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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빛으로 쓴' 시로 비탄을 전하다>- 박노해 시인 인터뷰
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25 조회수434 추천수1 반대(0) 신고
 

80년대 초에 나온 '노동해방문학' 격월간지를 기억하시는지?

나는 그 잡지를 빼지 않고 정독했다.

박노해 시인과 그의 친구들이 낸 잡지였던 것으로 안다.

그 책을 읽다가 마지막에는,

이 사람들이 운동권 동지들을

공격하면서 분열을 일삼는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박노해도 "힘들고 고독한 순간이 있다.

오랫동안 운동을 같이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을 때도 그랬다."고 말하고 있다.

박노해 형 박기호 신부(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싣고 있다.)도, 어제 칼럼을 읽으니까,

농촌에서 의식주를 함께 하는 '공동체마을'을 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두 형제는 순수하고 용감한 것 같다.

 

 

<빛으로 쓴' 시로 비탄을 전하다>

시인 박노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닫. 10년간 중동 분쟁 현장을 드나들며 찍은 사진을 모아 <라 광야> 전을 연 것이다.

시인은 혼이 밴 목소리로 모처럼 사진과 자신의 삶에 대하여 말했다.

 

2003년 어느 날, 시인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직후 국경을 넘는다. 그리고 그길로‘인류의 가장 아픈 지점’인 중동의 분쟁 현장으로 달려가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마을에서, 뜨거운 모래 사막에서 분노의 시선으로 사진을 찍는다. “폐허더미 분쟁 현장에서, 미칠 듯한 흐느낌이 들리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들 곁에서 함께 울어주고 바람 빠진 공을 차는 일 외에….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약자들이 필요로 하고, 강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카메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라고 그는 돌이켰다.

1월7일 오전. 시인 박노해씨(57)는 10여 년 동안‘빛으로 쓴 시’의 일부(37점)를 공개했다. 갤러리M(서울 을지로)에서 열리는 사진전 <라(Ra) 광야>(1월28일까지)에서다. 흑백 사진 대부분은 어두웠다. 특히 억압받는 민초들의 눈은 우물처럼 깊었다. 초대전을 기획한 갤러리M의 이기명 관장은“사진마다 진실하고 깊숙한 시적 울림이 전해온다”라고 평했다.

   
박노해 시인은 10년간 여러 국경을 넘나들었다.
박 시인은 “가슴을 울리지 않는 사진, 시가 울리지 않는 사진은 찍지 않았다. 그래서 10여 년 동안 같은 현장을 서너 번씩 찾아가야 했다”라고 말했다. 그가 피땀을 들인 덕에 단편소설 같은 이야기가 가득한 사진들을 곁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시회 이름이 <라 광야>다.
‘라(Ra)’는 고대 이집트어로 태양, 신성한 빛, 태양신을 뜻한다. ‘라, 라, 라’는 ‘안 돼! 안 돼! 안 돼!’라는 뜻도 있다.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중동 어느 마을에 들어갔더니, 한 부인이 빵과 무화과 등을 대접하며 “땅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라고 물었다. 내가 “없다”라고 대답하자, 이번에는 “양이 몇 마리냐?” “올리브나무가 몇 그루냐?” “부인은 몇 명이냐?”“자동차는 몇 대냐?” “자식은 몇 명이냐?”라고 거듭 물었다. 내가 모두 “없다”라고 대답하자 그녀가“라! 라! 라!(안 돼, 안 돼, 안 돼)” 하고 소리쳤다. 그 뒤 그 마을에서는 나를‘라 샤이르 박’이라 불렀다(샤이르는 시인이라는 뜻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불의한 권력을 비판하고,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신의 진실을 전하는 자'라는 뜻도 있다).

왜 그 위험한 분쟁 현장으로 떠나야 했나?
67억 지구인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 사회에는 이제 가난한 사람이 없다. 다만, 부자가 못 된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국경 밖으로 나갔다. 전쟁을 멈추게 할 힘은 없지만, 공포에 떠는 아이들과 함께 울고 놀아주겠다는 마음이었다.

시로 표현해도 됐을 텐데 왜 사진인가?
언어의 국경을 넘지 못하면 내 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카메라는 다르다. 게다가 약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도 카메라였고, 강자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카메라였다.

   
하산케이프는 인류 문명의 자궁인 강의 상류에 자리 잡은 8000년 유적이다. 터키가 강을 강로지르는 댐을 만들어 곧 수몰된 예정이다.
사진을 찍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참혹한 분쟁 현장에서도 충격적인 장면과 극적인 이미지를 향해 다가서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그 사건이 발생한 삶의 뿌리부터 찾았다. 수천 년 이어온 터전에서 지속되는 삶, 경작하고 노래하고 연애하고 아이를 낳고 기도하고 꿈꾸고 저항하는 민초들 속으로 나직이 스며들어 갔다. 그렇게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카메라에 담았다. 그래서 내 사진은 빛으로 쓴 시이다.

10여 년 동안 찍었으면 사진 양이 상당할 텐데, 전시 사진은 어떻게 골랐나?
지난 6개월 동안 사진을 골랐다. 모두 4만 장이 넘더라. 다시 보니 한 장 한 장이 심장을 도려내는 듯 고통스러웠다. 자살 폭탄을 결의하는 모습, 시신을 파묻는 사진도 있었지만 모두 제외했다. 대신 관람객이 봤을 때 스스로 성찰하거나  낯선 사회와 대화할 수 있는 사진 위주로 골랐다.

   
한밤중에 비밀 경찰의 눈을 피해 전통 의상을 입고 전통춤을 추는 쿠르드족 아이들.
사진 속에 유독 아이가 많다.
 
그곳 아이들의 꿈은 오직 하나다. 죽지 않고 살아서 학교에 다니는 거. 아이들과 헤어질 때 새끼손가락 걸며 굳은 약속을 한다. 아스마, 무함마드. 너희 죽지 말고 다치지 말고 살아서 다시 만나자. 아이들도 말한다. “샤이르 박, 꼭 다시 올 거죠? 울지 않고 꼭 살아 있을 게요.” 이번 중동 사진전은 내 생을 걸고 그 아이들과 한 약속이고, 내 비원의 기도가 담겨 있다.

현장에서 종종 눈물을 흘렸을 것 같다.
울지 않았다. 처참한 현장에서 내가 눈물을 흘리면 애써 참았던 그분들의 가슴에서는 통곡이 터져나오기에 일부러 웃고 장난치고 농담을 많이 했다.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땐 카메라로 눈을 감추었다. 그리고 홀로 어둠 속에서 시를 쓰면서 소리 없이 통곡하곤 했다.

말하는 모습이 종교인을 연상케 한다. 10년간 무슬림을 접했는데, 혹시 무슬림을 믿고 있는가?
어머니는 나를 어려서부터 가톨릭 신부로 키웠다. 그런데 군대 간 사이에 형이 먼저 신부가 되면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렇다고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는다. 신이 있다면 한 분뿐이다. 그분이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면 예수가 되고, 중동에서 태어나면 마호메트가 되고, 인도에서 태어나면 붓다가 된다고 믿는다.

새 시집은 언제쯤 나오나?
10년 동안 만년필로 꾹꾹 눌러쓴 시가 4000편이 넘는다. 중동·아프리카·몽골·중국 소수 민족의 이야기가 울고 있다. 가능하면 올해 10월까지 내려 한다.  

사회 현실을 외면한 듯한 행적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다.  
내게는‘과거를 팔아서 오늘을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었다. 함께 운동한 사람들이 주류가 되고, 그들이 과거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조용히 침묵하며 다시 새벽길을 떠나려 했다. 그러자 변절자, 빨갱이 같은 욕이 들렸다. 그동안 세상을 외면만 한 건 아니다.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이념과, 진보 재생이라는 화두를 잡고 집필과 연구 작업을 계속해왔다. 4~5년 뒤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진가
시인은 “아이는 요르단 강 근처에서 이스라엘 군 탱크를 향해 돌을 던졌다. 그러나 아잔 소리(코란 낭독 소리)가 들리자 새끼 밴 양을 껴안으며 더없이 평화로운 표정을 지었다”라고 촬영 순간을 소개했다(2008년).
인간 박노해의 삶을 돌아보면 무엇이었나?

내겐 어떤 자격증도 지위도 없다. 학연이나 지연도 없다. 70만원으로 한 달을 살 정도로 돈도 없다. 외국에서도 다르지 않다. 돌이켜보면, 고문과 사형 선고 그리고 무기수 생활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렇지만 그때그때 내 생을 불살라서 행복했다. 지금도 언제 죽어도 좋다는 기분으로 산다. 내 영혼이 부르는 대로, 내 몸이 원하는 대로 살아서 행복하다. 늘 언제 죽어도 후회가 없게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간다.

때때로 외롭고 힘들 것 같다.
힘들고 고독한 순간이 있다. 때때로 1975년부터 운동을 같이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얼마나 힘들면 나까지 비난할까 싶었고, 같은 수준으로 대응하면 서로 상처만 깊어진다고 믿었다. 시골에서 겪는 물질적 불편은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이 불편하고 영혼에 어긋나는 일은 적응하기 어렵다.   

2000년에 자급자족 공동체를 꿈꾸며 ‘나눔문화’를 만들었다. 공동체는 어느 단계에 와 있나?  
주말 농장을 빌려서 가난한 아이들과 함께 주말 텃밭을 가꾸고, 소박한 밥상을 차리는 수준이다. 올해 연구원 30여 명이 귀농해 농사짓고 사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은데, 누가 도와주는 사람이 나섰으면 싶다.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나?
월 70여 만원으로 시골 셋방에 살고 있다. 10여 년간 잊힌 덕에 동네 어른들도 그냥 일 잘하는 젊은이로 여긴다. 하루 다섯 시간씩 집필하고 나머지는 소일하거나 공부한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살지 않으면 정신을 지키기 어렵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을 평가해달라고 하자 시인은 “나중에…”라며 말을 아꼈다. 그렇다면 분쟁 현장으로 갈 계획은? 시인은“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린다. 사진전만 아니었으면 벌써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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