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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32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28 조회수555 추천수3 반대(0) 신고
 

 

 ♣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

 

II. 삼위일체

 

1. 성부

D. 하늘과 땅 (원죄)

c. 교만

이제부터 아담과 하와의 죄에 관한 성경구절을 하나하나 보면서, 우리 안에 어떤 죄의 경향들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창세 3장

 

1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가장 간교하였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재치 있고 약삭빠른’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영리했던 것이 뱀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뱀 자체를 나쁘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은 은총을 준 존재라는 것이고 이는 처음에 대천사였다가 교만으로 인해 쫓겨나게 되었다는 사탄을 연상케 합니다. 그런데 사탄이 하느님 나라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느나라에는 악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모든 사람이 접하게 되는 유혹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악은 존재할 수 없어도 유혹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혹을 당하는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예수님도 유혹받으셨습니다. 자유의지가 있는 어떤 존재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혹은 충분히 극복될 수 있습니다. 사실 사탄의 무리들도 스스로 유혹을 당하여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3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는 계약의 조항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어기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것이 입니다. 자신은 원하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면 죄라 할 수 없것입니다. 물론 부주의나 무지에서 오는 정도의 죄는 있을 수 있더라도 하느님과의 단절은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끝입니다. 유혹자는 죽는다는 것에 대한 재해석을 인간들에게 내려주어야 합니다. 죄를 지으면 영적으로 죽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떤 누구도 죄를 지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죽음은 영혼의 죽음을 의미하고 영혼이 죽으면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유혹자는 인간의 사고를 육체적으로 하도록 만듭니다. 즉, 육체적으로 죽지는 않는다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온전히 영적입니다. 첫 조상들은 죄에 대하여 매우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혹자와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저절로 그 경각심을 잃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죄를 짓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유혹자와 대화를 나눕니다. 유혹자는 가장 영리한 존재였고 이러한 유혹자와 대화한다는 것은 이미 죄를 지을 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십 일간 단식하시고 사탄에게 유혹을 당하실 때 그와 대화하지 않으시고 ‘성경의 말씀’과 함께‘사탄아 물러가라!’라는 단순한 말로 유혹자를 물리치셨습니다. 소름끼치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유혹자와 대화하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그 나무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렇듯 하와가 유혹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대화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죄는 하와의 마음속에 이미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유혹자가 자극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도록 만들고 하느님을 낮추어 믿지 못할 존재로 만들버린 것이었습니다. 하와는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의사암을 겪어보아야 그 병을 아는 것이 아니듯이 또 그 병을 알기 위해서 일부러 암에 걸려보는 사람은 없듯이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을 알기 위해서 악에 떨어지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하느님의 피조물이고 피조물답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나친 호기심부터가 이미 죄입니다.

 

하느님처럼’이란 말은 교만의 조건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사람을 심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자녀를 만들고 자신들의 것이라 생각하여 낙태도 하고 삶을 강요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하느님처럼’생각하여 하느님의 계명들무시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 안에는 기본적으로 원죄의 교만이 깔려있습니다. 내’가 ‘무엇’이 된다면 내 안의 ‘주님’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그러나 ‘나’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면 하느님께서 나의 ‘주인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나’를 죽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6 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7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자는 남편에게도 그 열매를 먹으라고 건네줍니다. 여기에서 이상한 역할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더 이상 유혹자는 뱀이 아닙니다. 여자가 새로운 유혹자로 등장하고 남편은 일말의 저항도 없이 그 유혹에 빠지고 맙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써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죄짓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죄인들끼리는 서로 간에 죄더 짓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에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탄이 왜 인간을 죄짓게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죄인은 남도 죄인이기를 원합니다. 물론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선과 악이 우리 안에서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와서 고생하는 것을 보며 자신을 위안하게 됩니다. 마귀도 마찬가지고 마귀가 되어가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들이 깨끗해져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눈뜨고는 못 보아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지으면서 발생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은 높은 이들의 시기로 돌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유혹에 넘어가기 쉽고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죄인들 틈에 끼지 않는 것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서른 살까지는 보호된 가정에 사셨고 죄인들을 만나지 않으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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