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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승리의 삶" - 1.3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2-01 조회수449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1.31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예레1,4-5.17-19 1코린12,31-13,13 루카4,21-30

                
                                                  
 
 
 
 
 
"승리의 삶"
 
 


‘승리의 삶’ 오늘 강론의 주제입니다.
믿음의 승리, 사랑의 승리, 희망의 승리이자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내가 살고 네가 죽는 승패가 분명한 승리가 아니라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상생(win-win)의 승리입니다.

이런 승리의 자랑으로, 하느님 자랑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저는 지난 1월29일 한 사건을 통해
이런 감동적인 하느님의 승리를 체험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아는 착하고 믿음이 좋은 중년 부부입니다.
 
좋은 조건을 다 갖추었는데 꼭 한 가지가 문제였습니다.
남편인 형제분이 직장에서서의 승진시험에 계속 통과하지 못해
제때에 승진하지 못함이 늘 마음에 짐이었습니다.
 
부부가 함께 기도하며 눈물겹도록 정성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번번이 불합격이었습니다.

이번도 수도원의 특별한 배려로 약 2주 동안
피정 집에서 본격적으로 기도하고 공부하며 맹렬히 준비했는데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듯 29일 시험결과 까지
약 10일간 초조와 불안 속에 지낸 형제님이었습니다.
 
29일 발표 당일에는 오후 4시경부터 수도원에 와서
기도도 하고 산책도 하며 마음과 몸을 추스르며 연락을 기다렸습니다.
 
오후 7시20분까지 연락이 없어 어둡고 추운 표정으로 떠난 모습이
영 마음에 걸렸는데 끝기도 후 전화가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합격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잘 살겠습니다.”
집에 가는 도중 합격 연락을 받고
흥분 가득한 떨리는 목소리로 핸드폰 전화를 한 것입니다.
 
마침 그날이 부인의 생일이라 하니
이보다 더 좋은 생일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 날 새벽 미사에 성전 뒤쪽을 보니
그 부부가 조용히 앉아있었습니다.
 
그 먼 곳에서 새벽 일찍 감사 미사를 봉헌하러 온 것입니다.
 
미사가 끝난 후 저도 그 부부와 함께 한 자리에서
합격한 남편에게 진심에서 울어난 덕담을 하기 전에
우선 궁금한 점을 물어봤습니다.

“도대체 이번 시험 몇 번째 본 것입니까?”

아주 쑥스럽고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일곱 번째입니다.”

말 그대로 믿음의 승리, 희망
의 승리, 사랑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였습니다.
매년 1회, 일곱 번째 합격이니 무려 7년 동안
부인의 사랑의 내조와 더불어
말 그대로 칠전팔기요 백절불굴의 믿음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하느님의 힘으로, 몸과 마음 하나 망가지지 않고 살아 온 것입니다.
“그대로 칠전팔기입니다.
  형제님 자신에 대한 승리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고시 합격 이상의 큰일을 해냈습니다.
  부인에게 최고의 생일 선물입니다. 이제부터 잘 사는 것만 남았습니다.”
 
이런 얘기를 어는 젊은 수도형제에게 들려줬더니
그 형제의 대답이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
 
“아마 하느님이 그분을 크게 쓰시려고 그런 시련을 주셨나 봅니다.”
이 말을 그 형제님께 꼭 전해주려 합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평생 전쟁입니다.
 
승리의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살 때 승리의 삶입니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체력, 권력, 금력의 우상들 진정한 힘이 아닙니다.
언젠가 사라질 힘입니다.
 
체력이 떨어지면, 권력을, 재력을, 금력을 잃어버리면
그 삶 초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진정한 힘은 영혼의 힘, 정신의 힘, 믿음의 힘입니다.
 
바로 하느님께 뿌리 내린 힘이기에
보이는 것들 모두 사라져도 영원히 남아있어 존엄한 품위를 유지해 줍니다.
 
제가 즐겨 드는 예가 팬티와 팬티 끈입니다.
팬티 끈만 튼튼하면 팬티는 좀 떨어져도
속에 입어 보이지 않기에 끝까지 입을 수 있습니다만,
팬티 끈이 끊어지거나 느슨해지면
아무리 팬티가 좋고 고와도 쓸모없어 버려질 것입니다.
 
팬티 끈이 영혼이라면 팬티 천은 육신입니다.
 
영혼만 튼튼하면 웬만한 육신의 고통은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영혼이 튼튼하면 육신은 영혼에 순종하지만,
영혼이 약해 주인 역할을 못하면
육신의 배반은 줄을 잇고 끝없는 육신의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진정한 힘은 영혼의 힘입니다.
 
몸은 커도 점차 체력도 정신력도 약해져서 병도 많은 현대인들 이지만
예전 사람들 몸은 작았어도 탄탄했고 정신력도 튼튼했습니다.
 
믿음과 함께 가는 영혼이요 영혼과 함께 가는 육신입니다.
 
믿음의 힘은 그대로 영혼의 힘이요,
영혼이 튼튼하면 몸도 더불어 튼튼해지기 마련입니다.
 
1독서의 예레미야 영혼의 끈은 얼마나 튼튼한지요.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의 믿음 있어 튼튼한 영혼입니다.
 
다음 말씀 예레미야는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요
이 말씀 그대로 믿을 때 샘솟는 영혼의 힘입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낳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거 너를 세웠다.”

온통 하느님이 주어이고 예레미야는 목적어입니다.
 
뗄 레야 뗄 수 없는 주어와 목적어의 관계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결코 우연한 우리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뜻하셔서 세상에 파견된
필연적인 우리 존재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믿음입니다.
 
관계가 깊을수록 좋은 믿음에 튼튼해지는 영혼입니다.
 
다음 말씀 또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예레미야의 승리는 바로 믿음의 승리이자 하느님의 승리요
믿는 모든 이들의 승리를 앞당겨 보여줍니다.


둘째, 사랑으로 살 때 승리의 삶입니다. 사랑의 승리입니다.
인자무적이란 말도 있듯이 사랑 앞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사랑의 무능이 하느님의 전능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으로 마지막 승리를 이끌어 내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에 뿌리내려야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집착 없는 무사한 사랑,
기다리는 사랑, 지칠 줄 모르는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의해 부단히 정화되고 성화되어야 하는
우리의 조급한 이기적 불순한 사랑입니다.
 
사랑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마치 태양 같은 것,
사랑 사라지면 영혼은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 좋은 은사들도 사랑 없으면 아무 쓸모없습니다.
 
오늘 2독서 사도 바오로 역시 사랑의 승리를, 하느님의 승리를 보여 줍니다.
 
사랑의 대헌장이라지만
실상 분열 상태에 있는 코린토 교회를 향한 간곡한 충고입니다.
 
어느 공동체나 양상만 다를 뿐 다 분열의 아픔과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바로 분열의 치유와 예방에 만병통치약은 사랑뿐입니다.
 
이 사랑의 거울 같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내 사랑을 비춰보십시오.
길다 싶지만 워낙 좋은 내용이라 인용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평생공부가 이런 사랑공부입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사랑에는 영원히 초보자임을 인정하는 게 겸손입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힘, 사랑의 승리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우리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공부에 항구하여 우리의 존재가 사랑자체가 될 때
보이는 모두가 하느님의 얼굴일 것입니다.
 

셋째, 희망으로 살 때 승리의 삶입니다. 희망의 승리입니다.

희망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절망하는 것이 대죄입니다.
 
절망이 만연한 세상입니다.
희망으로 빛나야할 젊은이들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어두워지는 오늘의 세상이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에게 참 희망을 주는 정치가 종교가, 좋은 정치 좋은 종교입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

아무리 좋은 세상, 좋은 사람이라도
보이는 세상 것들에 궁극의 희망을 두지 마십시오.
 
곧 절망의 나락에 떨어집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세상이, 사람이 희망이 될 수 있고,
힘들고 험한 세상에 망가지지 않고 항구히 제 자리에 충실하면서
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절망에서 샘솟는 희망이요,
슬픔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불안 중에 샘솟는 평화입니다.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 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희망의 승리는 결국 하느님의 승리를 뜻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보십시오.
결코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궁극의 희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 한 고향 사람들이지만
안타깝게도 희망의 눈은 닫혀 있어,
‘하느님의 희망’으로 그들을 방문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선입견에 희망의 눈이 닫힌 고향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에게 희망을 두었더라면
상처에 그 마음을 추스르기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향해 희망의 눈이 활짝 열린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 보다는 이방인들을 향하고 있음을 봅니다.
 
은연 중 시돈 지방 사렙타의 이방인 과부에게 파견된
엘리야와 이방인인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나병을 치유한 엘리사를
자신에 견주는 예수님이십니다.

희망의 사람들이 진정 강한 자들입니다.
이들을 이길 자 아무도 없습니다.
희망의 사람만이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화가 잔뜩 난 고향 사람들,
예수님을 고을의 산 위에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새처럼 훨훨 희망의 날개를 치며 날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희망의 힘으로 두려움 없이 적진을 정면 돌파한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 희망의 광채에 눈멀어 옆으로 길을 터 준 고향 사람들입니다.
 
희망 자체이신 하느님을 향해 가는 희망의 사람들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우리 삶은 평생 전쟁입니다.
 
고맙게도 주님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믿음의 힘, 사랑의 힘, 희망의 힘입니다.
하느님의 힘입니다.
이게 진정 내적힘이요 더불어 튼튼해지는 영혼, 육신입니다.
 
믿음의 승리, 사랑의 승리, 희망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의 승리입니다.
 
이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맛나는 세상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불퇴전의 믿음과 사랑과 희망으로
우리를 꽉 채워 주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언제나 당신만을 믿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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