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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설날 본문+해설+묵상>
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2-10 조회수502 추천수2 반대(0) 신고
 

설날(음력) 미사


제1독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6,22-27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0(89),2와 4.5-6.12-13.14와 16(◎ 17ㄱ)

◎ 주님 저희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나기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주님은 하느님이시옵니다.

정녕 천 년도 주님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나이다. ◎

○ 주님께서 사람들을 쓸어 내시면,

사람들은 아침 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가나이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

○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 아침에 주님의 자애로 저희를 배불리소서.

저희의 모든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 주님 종들에게,

주님의 영광이 그 자손들 위에 드러나게 하소서. ◎ 

 

제2독서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4,13-15

13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14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15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시편 145(144),2

◎ 알렐루야.

○ 나날이 주님을 찬미하고,

영영세세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다.

◎ 알렐루야. 

 

복음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5-40 또는 18,9-27 또는 마르 4,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루카 18,9-27)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5 사람들이 아이들까지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6 예수님께서는 그 아이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8 어떤 권력가가 예수님께, “선하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20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1 그가 예수님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이르셨다.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3 그는 이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그가 큰 부자였기 때문이다.

24 예수님께서는 그가 매우 슬퍼하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26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


또는 마르 4,1-9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3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영성체송


히브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시로다. 


해설과 묵상


제1독서(민수 6,22-27) 해설

<평화는 온전한 삶, 인생이다>


축복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 가운데 생생하게 현존하여 계시면서 그들을 보호하심을 가리킨다. 이 본문은 아주 오래된 축복을 보존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는 야훼를 세 번 부르고 있다. 이런 축복은 백성이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은 백성을 평화로써, 다시 말해서 온전한 생명으로써 축복하신다. 성서에서는 평화를 온전한 생명(삶)으로 본다.


화답송(시편 90[89],2와 4.5-6.12-13.14와 16[◎ 17ㄱ]) 해설

<주님께 감사하라>


하느님께 감사하라! 이 시편은 전례를 거행하면서 집단으로 감사드리는 기도다.

공동체는 교대로 후렴을 읊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당신 사랑을 기린다. 시편 작가는 하느님의 돌보심을 받은 자기 체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체험으로부터 주님을 신뢰하라는 교훈을 끄집어낸다.


제2독서(야고 4,13-15)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야고보는 장사에만 정신이 빠진 자들을 비판한다. 그런 자들은 자만심에 사로잡혀 자기네가 모든 상황과 자기네 생명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상상하면서 더욱더 부유한 사람이 되고 안정된 삶을 확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루카 12,18-20). 그렇지만 오로지 하느님만이 인간의 생명과 운명의 주님이고, 당신만이 내일을 알고 계신다. 인간이 할 몫은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고 오늘 여기에서 선을 행하는 일이다.

저자는 모든 것이 오로지 소유에 달려 있다고 보는 부자들의 자만심을 비판한다. 인정 없는 부자들은 하느님 자리에 자기네 자신을 올려놓고 모든 것을 자기네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하느님이 사람들 위에 계시고, 모든 사람의 생명이 그분께 달려 있다. 하느님만이 생명과 만물의 유일한 주인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생명의 원천이요 목적이요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 선을 행하는 도리밖에 없다.


복음(루카 12,35-40) 해설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언제 오시는지 모르게 오실 주님을 끊임없이 기다리면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늘 깨어 있으면서 스스로 나서서 타인들을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공동체를 섬기며 공동체의 필요를 채워 줄 책임을 예수께로부터 받은 지도자들에게 특히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책임도 그만큼 무거워진다.

공동체 지도자들의 의무는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을 섬기는 일이다. 권위는 섬기기 위해 있다. 섬기는 권위라야 참된 권위다. 섬겨야 참된 권위가 선다. 이 섬김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 즉 음식과 옷과 집을 주는 일,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재화를 골고루 나눔으로써 정의를 실천하게 하는 일, 서로 위해 주고 나누는 인간관계를 맺어 주는 일에서 시작한다.

그렇지만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섬기는 권위를 지배하는 권력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자기 기능과 역할을 배반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지도자들이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을 무시하고 억누르고 제멋대로 자기 뜻을 펼치게 된다. 그럴 경우 지도자들은 악마의 유혹에 떨어져 공동체를 미움과 불의로 가득 차게 만든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한 경우는 종교지도자들이 위선적인 권위를 내세워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지배권력과 사회불의를 편드는 경우다.


또는 (루카 18,9-27) 해설

<자기가 보잘것없음을 인정하면서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기댈 필요가 있다>


한결같음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자기가 보잘것없음을 인정하면서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기댈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하느님께 올바르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순전히 당신이 주시는 선물이다.

이 비유는 유다인 사회의 극단적인 두 가지 예를 소개한다. 스스로 의롭고 완전하다고 판단하는 바리사이와 억압자 로마 제국을 위하여 세금을 거둬들여야 하는 자기 공직 때문에 업신여김과 소외를 당하는 세리를 소개한다. 바리사이는 자기 죄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자기는 율법을 착실히 지켰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는 세리와 같은 죄인이 아니라고 힘주어 아뢴다. 그와 대조적으로 세리는 자기가 죄인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느님께 용서와 자비를 구할 일밖에 없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사실은 불의한 사회와 체제 속에서 근심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공범자요 죄인일 수밖에 없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바리사이는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인정하는 세리는 용서를 받는다.

여기에서 ‘어린이’는 사회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어린이는 종들처럼 가진 것이 없어 야심을 품지도 않고 품을 수도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들도 자유로운 삶과 정의로운 나라를 바라고 있다.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고 온갖 자만심과 야심을 버리고 자유와 생명을 안겨 주는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율법과 계명을 착실히 지키는 부자 한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지 묻자 예수께서는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돈과 재물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말고 하느님의 것과 가난한 사람들의 것으로 여기고 그대로 행하라는 말씀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을 함께 살게 하는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 부자는 몹시 괴로웠다.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재물을 떠나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예수께서는 부자가 부자로 남아 있으면서 자기 자신과 자기 식구만 생각하는 한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신다.

재물은 온 인류가 따뜻하게 나누어 쓰라고 하느님이 공으로 주신 선물이다. 부유한 사람들과 부유한 나라들이 자기네가 가진 것을 공으로 나누어주어야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나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자유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자기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 부자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부자도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스스로 나서서 나눔을 실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오늘날 인류 가운데 대다수 사람들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하루에도 십만 명씩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 판에 소수 사람들은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소화불량과 비만증을 걱정하고 있음을 보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 실현하는 일이야말로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할 수 있는 하나뿐인 길임을 알 수 있다.

온 인류를 화해하게 하고 일치하게 하는 하느님 나라 운동에 몸 바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에 대한 무분별한 애착을 버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그윽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또는 (마르 4,1-9) 해설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작지만

땅만 좋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온갖 걸림돌에도, 씨를 뿌리는 사람은 수확을 기대하면서 자기 할 일을 해나간다. 예수께서도 온갖 반발과 걸림돌과 오해에도 당신이 할 일을 다 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사명을 끝까지 수행할 것이고 성공을 거두실 것이다. 예수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씨앗이 뿌려져 열매를 맺으려면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는 좋은 땅에 떨어져야 한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받아들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는 초대를 받는다. 우리가 불의한 사회의 인습과 규범에 얽매여 있거나, 열정이 쉽게 사그라지고, 재물이 약속하는 안전을 잃을까 두려워하면 하느님 나라의 열매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작지만 땅만 좋으면 무성하게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비유를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묵상

<설날에 다시금 세우는 결단>


설날, 우리가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되는 오늘, 지나간 한해를 돌이켜 반성하고 새로이 맞이하는 한 해를 설계하면서, 되돌아오지 않고 흘러가버릴 일회적인 한 해와 남은 생애를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생각과 길과 말씀에 충실한 사람으로 살아낼 것인가를 궁리하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결심을 세울 일이다. 이를 위해 오늘 독서와 복음에 비추어 우리 인생목표와 생활실천을 점검해보는 것도 유익할 것 같다.

우리의 실천생활과 마음씨를 차분히 자세하게 살펴보면 누구나 자기가 하느님의 생각과 길에서 멀리 떨어진 속물이요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신다. 불의한 생활을 청산하고 허영과 허욕에서 벗어나라고 촉구하고 계신다. 내 주위와 세계 곳곳에서 비참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 때, 안정된 자기 생활에 안주하면서 무관심과 냉혹함을 고집하는 나는 불의한 사람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나라들을 무시하고 냉대하고 더욱 짓밟고 수탈하는 가풍과 국가정책에 은근히 동조하고 있는 나는 불의한 사람이다. 지금은 비록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입장이지만, 언젠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재력과 권력을 쥐고 남보란 듯이 으스대고 남들 위에 군림할 날을 꿈꾸고 도모하고 있는 나는 불의한 사람이다.

그런 불의하고 허욕에 찬 나는 새 사람으로 다시 나지 않고 죽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살아 있는 한 회개하여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기를 학수고대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회적인 인생이란 매 순간순간이 종말론적인 마지막 때인 것이다. 용서하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야말로 자꾸만 잘못하고 죄를 짓고 불의한 생활과 욕망에 빠지는 우리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는 희망이 되시는 것이다.

자비를 베푸시고 용서하시려는 것이 하느님의 생각이요 하느님의 길이다. 모든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바라시는 생명의 하느님의 생각이요 길이다. 인정사정없이 단죄하고 죽이는 것이 그분의 뜻이 아니다. 사람을 끝까지 미워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인자한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어떤 사람이 불의한 사람이라고 해서 냉혹하게 단죄하고 처단하고 영원히 멸망할 사람으로 여겨 실망하는 짓은 하느님의 생각과 길에서 영 동떨어진 행위요 용서하고 참는 사랑으로 가득하신 하느님께 대한 월권이다. 정말 불의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불의에 증오와 복수심으로 맞서지만, 스스로 불의한 생활을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불의를 인내롭게 일깨워주고 회개하도록 가능한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부족한 사람끼리 가장 사람다워지는 길은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닮는 데 있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용서하시고 살리시려는 하느님의 생각과 길은 증오하고 죽이려는 사람의 생각과 길보다 한없이 높다.

예수께서는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재물을 쌓고 좀 안락하게 지내고 후손에게 그 재물을 물려주는 것을 인생목표로 삼는 일이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짓인가를 명백히 밝히신다. 재물이란 ‘쌓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재능이나 능력도 ‘뽐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재물은 ‘나누어’ 정과 기쁨을 넘치게 하라고 주셨고, 재능과 능력은 남들을 ‘섬기는’ 일에 몸 바치라고 주셨다. 재물이나 능력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느님 홀로 그 주인이시다. 재물이나 능력 그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모으고 쌓고 자랑하는’ 이용물이 되어서는 재앙을 가져다줄 뿐이다. 재물과 능력이 ‘서로 나누고 섬기는’ 이용물이 되어야 영원한 기쁨과 행복과 생명을 가져다준다.

바야흐로 개인 내면세계에서나 가정 안에서나 국가 안에서나 국제관계 안에서 ‘재물 쌓기 및 뽐내기’와 ‘서로 모든 것을 나누고 섬기기’가 치열하게 대결하고 있다.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중간노선은 없다. 한쪽은 패배하고 한쪽은 승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승리하셔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승리하여야 한다. 민족사회와 인류사회가 승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아름다움과 올바름과 착함과 덕스러움의 근원이요 온갖 기쁨과 행복의 샘이신 하느님께서 만물과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것이 되셔야 한다.


복음해설(2)


깨어 있음과 충실함(12,35-48)

이 연설 대목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ㄱ) 종들이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린다(35-38절). ㄴ) 도둑이 몇 시에 올지 모른다(39-40절). ㄷ) 예수께서 집사라는 새로운 심상을 사용하신다(41-46). 마지막으로 ‘주다/청하다’라는 이중명사로 생각을 집중한다. 즉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미래에). 세 가지 첫 심상으로 나타낸 종말론적 생각을 아직도 보존하고 있다(47-48절). 깨어 있으라는 주의는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24,43-51; 마르 13,33-37)에 나온다.

깨어 있으라는 이 권고는 다가오는 마지막 앞에 나온다. 마지막 때(보편적 종말) 또는 각 사람의 마지막(개인의 종말)이 어떻게 될지 질문을 던진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16-20)와 가난한 나자로의 비유(루카 16,19-31)를 통하여 우리는 루카가 각 그리스도인의 죽음도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이 연설 대목에서 루카는 개인의 종말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면서 보편적 종말도 암시하고 있다.

35-38절: 유다인들은 길을 떠나거나 일을 하려 할 때 허리에 띠를 맸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정신과 마음을 가다듬는 것을 뜻했다(참조. 탈출 12,11; 1베드 1,13). 등불을 켜고 있다는 말도 같은 뜻이다(참조. 루카 8,16; 11,33). 메시아께서 베푸시는 잔치는 루카 복음서의 주제다(참조. 5,34). 유다인들은 밤을 세 시각으로 나누고 로마인들은 네 시각으로 나누었다.

39-40절: 이 두 구절은 비유의 나머지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도둑도 아니고 도둑이 들지 못하도록 지키는 주인도 아니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시다(참조. 1테살 5,2-11; 2베드 3,10; 묵시 3,3).


(또는) 복음해설(2) 루카 18,9-27


9-14절: 이 비유는 루카의 고유한 비유 가운데 마지막 비유다. 이 비유 안에는 보편적 구원, 구원을 받는데 율법만으로는 부족함, 하느님의 자비 등 루카의 특징적인 주제들이 펼쳐져 있다. 특히 율법을 자세하게 지키면서 하느님 앞에서 지나치게 자기를 높이 평가하는 짓을 단죄한다. 그 외에도 이 비유(또는 본보기)는 기도할 때 하느님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를 강조한다.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은 율법을 착실히 지키기 때문에 의롭다고 여기고 있었다. 자기네 의로움이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겨 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네 자신을 신뢰하고 있었다(2코린 1,9). 한편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면서도 죄인들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들에게만 자비로우시다고 믿었다. 이 이야기는 그런 태도를 단죄한다.

경건한 유다인에게 기도하는 시간은 아침, 세시, 저녁이었다. 바리사이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서 기도를 바쳤다.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물도 마시지 않았다. 십일조에 관해서는 루카 11,42; 신명 14,22-27; 민수 18,21-24를 참조할 것. 그와 반대로 세리는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한다(참조. 시편 51,3). 세리들은 죄인이라는 악명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 아니라, 흔히 실제로 그런 자들이었다. 세리들은 첩을 거느리고,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아마 자캐오도 그런 경우였을 것이다.

이 비유의 결론은 세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다음(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는 선언을 받은 다음) 떠나고, 바리사이의 경건함과 자만심은 하느님께 인정을 받지 못한다. 14절의 뒷부분은 다른 곳에도 나온다(14,11; 마태 18,4; 23,12). 이 문맥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방식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문장이 나온다. 즉 하느님 나라의 기준은 사람들의 기준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위에서 한 말을 요약해 본다. ㄱ) 과부는 참된 기도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하느님께 다다를 때까지 바치는 끈기 있는 기도를 보여준다. 하느님이 항구한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말한다. 나머지 복음서들에도 기도에 관한 그런 가르침이 나온다. ㄴ) 박해받는 사람들과 무시당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끊임없는 기도로 그 신뢰를 나타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ㄷ) 세리는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준다. 그들에게는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갈 길이 있다. 자캐오의 본보기가 그것을 보여준다.


어린이들과 하느님의 나라(18,15-17)

이 이야기는 마르 10,13-16; 마태 19,13-15와 병행한다. 루카는 이 이야기 속에다 여러 부분을 합쳐 놓았다. 그리고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쓰다듬어 주신 장면은 겸손을 다루는 대목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겠습니까?”라고 17,20에서 예수께서 내놓으신 질문에 대한 답변도 된다. 루카는 자기가 이용한 자료(마르코)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태도를 보고 언짢아하면서 어린이들을 껴안으시는 장면을 뺀다. 루카는 예수께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시는 모습을 별로 보여주지 않는다.

이 대목의 문학유형은 전기체(傳記體) 격언이다. 이 이야기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ㄱ) 사람들과 제자들이 밀고 당기는 상황을 제시한다(15절). ㄴ) 그 상황에 대한 응답으로서 예수께서 행동을 취하고 말씀을 하신다(16-17절).

15절: 제자들은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귀찮아하시리라고 잘못 짚는다. 예수께서도 어린이들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지중해 부근 지방들에서는 어린이들을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았다.

16-17절: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받아들이면서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하자면, 어린이처럼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들과 궁핍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특권적인 전달대상자라는 말씀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사람들은 ‘어린이와 같이’라는 표현이 모범적인 덕행을 보여줌, 악의가 없음, 양순함,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음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좀 무리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어린이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더구나 덕행의 모범으로 여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이에게서 모범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점이 있다. 그것은 어린이의 태도, 즉 자기가 약하고 부족한 줄을 알아 애정을 기울여 돌보아 주는 부모를 신뢰하는 태도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 안에서는 아무런 장애물도 만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신뢰심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태도는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의 태도(루카 18,9-14)와 정반대다. 마지막에 나오는 가르침은 루카 10,21-22와 병행한다. 즉 복음은 순박한 사람들에게 계시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한 말을 요약해 본다. 하느님의 나라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것이다. 보호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메시아께서 오셨다(참조. 루카 3,16-31; 7,18-23; 9,46-48). 메시아의 사명을 이어가는 제자는 자기 태도와 처신을 그와 똑같은 방향으로 잡아야 한다. 그와 반대되는 태도와 처신은 다음 대목에 나오는 부자 ‘권력자’의 야심과 탐욕이다. 


위험천만인 재물과 재산(18,18-30)

병행 대목인 마르 10,17-31; 마태 19,16-30을 참조할 것.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으려면 이 세상의 재물과 재산에 마음을 쏟아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의 재물과 재산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예수께서 당신께 질문을 던지는 ‘권력자’에게 해 주시는 답변이 그것을 입증한다.

여기에서 다시금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진 격언과 만나게 된다. ㄱ) 예수께서 유다인 ‘권력자’와 대화를 나누신다(18-25절). ㄴ)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고 사람들이 질문한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신다(26-27절). ㄷ) 베드로가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변하신다(28-30절).

18-30절: 마태 19,22에서는 ‘젊은이’가 나오지만 여기에서는 ‘권력자’(‘아르콘’, 우두머리)가 나온다. 루카는 아마 바리사이 분파에 속한 율법학자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서 우리는 루카가 예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나오셨음을 부인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씀은 분명히 “선함의 원천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예수님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하심이 바로 하느님의 선하심이다.”(플루머)라는 뜻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착한 유다인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계명들(참조. 탈출 20,13-16; 신명 5,16-20)을 꺼내신다. 세 복음서 저자들은 그 계명들의 순서를 말할 때 차이를 보인다.

루카는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처럼 사는 일” 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을 위한 새로운 요구들을 제시하면서, 마태오처럼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루카가 요구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의 노선, 즉 다른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해 이 세상의 재물과 재산을 포기해야 한다는 노선에 들어 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즉 자기는 계명들을 착실히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 권력자, 자기는 이미 하느님의 착실한 제자라고 자신하는 그 권력자에게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다인 권력자(우두머리)는 이 세상의 재물과 재산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루카가 모든 사람에게 이 세상의 모든 재물과 재산을 포기하라고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데 있지 않다. 여기에서 본질적인 점은 이 세상의 재물과 재산이 어떻게 제자로 하여금 스승을 따라 스승처럼 살지 못하게 가로막을 수 있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질문을 던지던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그와 반대로 예수께서 유다인 권력자에게 직접 말씀을 하고 계심이 분명하다.

낙타와 바늘귀는 세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온다. 이 문장은 문자 그대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과장법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용하신 격언의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다(참조. 마태 19,23-26; 마르 10,23-27).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에 관한 질문은 이 세상의 재물과 재산이 하느님이 복을 내려주고 계신다는 표시임을 전제하고 있다. 이 질문은, 만일 이 세상 재물과 재산이 하느님이 내려주신 복이라면, 그 복을 걷어차 버리고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묻는 질문이다. 그 질문을 받은 예수께서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은 하실 수 있다고 답변하신다(자캐오의 경우가 예수님의 답변을 입증한다.).

28절에서 베르도는 제자들을 대신하여 자기들은 스승을 따르고 스승처럼 살려고 모든 것을 버렸으니 무슨 보답을 받겠는지 여쭙는다. 루카는 자기가 열거하는 포기 품목 목록에 ‘아내’를 덧붙인다(참조. 루카 14,26).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들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포기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고, 그 다음에는 영원한 생명을 받으리라고 대답하신다. 루카는 이승살이에서 받을 복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아마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누리는 형제애와 연대 그리고 아무도 헤칠 수 없는 마음속 그윽한 평온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참조. 루카 12,31-32; 사도 4,32-37).

루카는 이 세상 재물과 재산을 단죄하지 않는다. 나쁜 것, 악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 재물과 재산에 대한 집착이 안겨줄지도 모르는 불행과 멸망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하고 있다. 재물과 재산은 덫과 같다는 것이다. 루카 복음서에서 언급하는 부자들(루카 12,16-20; 16,19-31)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마태오와 자캐오 같은 착한 부자도 있다. 그런 부자는 자기 재산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그 재산이 하느님이 공으로 주신 선물임을 잘 알고 있다. 재물과 재산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투명하게 인정하면서 산다. 자기 재물과 재산을 가난한 모든 사람의 빈곤을 해결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위에서 한 말을 요약해 본다. ㄱ)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자기가 하느님의 계명을 착실히 지키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면서도 더 보람 있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런 그가 스승의 초대를 듣는다. 그러나 그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한다. 재물과 재산에 대한 집착이 그를 짓누르고 있고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루카 12,34) ㄴ)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고 사람들이 던진 질문은 하느님이 선물로 주신 재물,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라고 주신 재물을 마치 가지 것인 양 여기고 있음을 전제한다. 루카는 독자에게 인간들의 기준과 하느님의 기준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라고 초대한다.


(또는) 복음해설(2) 마르 4,1-9


“4,1-9: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고 군중을 가르치던 겐네사렛 호숫가로 돌아와 배에 올라 가르침을 주신다. 마르코는 군중의 신중한 태도와 예수께서 펼치신 가르침을 강조한다.

마르코는 그 가르침이 비유를 통하여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한다. 저자는 자기 청중에게 친숙한 이야기 맥락 안에서 심상과 비교를 통하여 말을 한다. 그리고 보통 분명한 언어를 사용한다. 그 언어는 우리를 뛰어넘는 주제들을 알아듣도록 도와준다. 그 주제는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말씀의 신비다.

비유는 “자, 들어보아라.”라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9절)라는 구절로 끝맺는다. 이 결론은 이미 독자로 하여금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길로 들어서게 한다.

비유로 말하는 예수께서는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을 제시한다. 누군지 모르는 씨 뿌리는 사람은 청중이 씨앗에 관심을 집중되도록 하기 위하여 사라진다. 군중이 앉아 있는 땅은 그 비유를 알아듣도록 도와준다. 모든 씨앗은 땅에 뿌려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본문과 다른 비유들을 알아들으려면, 이사 55,10-11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땅을 적시는 비처럼 떨어짐을 상기하는 것이 좋다. 창세 1에서, 나무에서 나오는 씨앗은 하느님의 창조능력을 나타낸다(참조. 창세 1,11 이하; 1,29; 8,22). 그리고 풍작은 복을 받았음을 나타낸다(참조. 창세 26,12). 친구의 포도밭을 두고 부른 노래에서(5,1-7), 흉작은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한 씨알에서 백 개의 씨알이 맺는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충만함을 가리킨다.

이 비유는 땅에 떨어진 씨앗들에게 일어난 일에 초점을 맞춘다. 그 씨앗들이 만나는 장애물에 대하여 말한다. 처음 세 부류의 씨앗들은 사고를 당한다. 어떤 씨앗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는다. 또 어떤 씨앗들은 돌밭에 떨어진다. 흙이 별로 없어서, 싹은 트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말라버린다. 그리고 어떤 씨앗들은 가시덤불에 떨어진다. 덤불에 치어서 자라지 못한다. 많은 해설가들은 서구 사람들 관점으로 씨 뿌리는 방법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으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J. 예레미아스는 예수님의 비유에 관한 자기 고전다운 저작물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씨 뿌리는 방법이 어떠했는지를 설명한다. 즉 먼저 씨를 뿌리고, 그 다음에 땅을 갈았다는 것이다. 어떻든 마르코는 땅과 씨앗이 직접 접촉하는 과정, 씨앗들이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모습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씨앗들이 결실을 맺는 데 알맞은 좋은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20세기 초에 맨 처음으로 비유를 역사적으로 비평한 학자 율리허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세 가지 종류의 땅에 대한 묘사가 마지막까지 긴장을 유지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는지, 그리고 각 씨앗이 은유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물을 수 있다. 적절치 못한 조건을 맞이하는 씨앗들, 즉 새들이 쪼아 먹고, 햇빛에 말라버리고, 가시덤불에 치인 씨앗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 결실을 맺는 씨앗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의심할 여지없이, 이 비유는, 부딪칠지도 모르는 갖가지 저항, 여러 종류의 땅이 상징하는 그 저항에도, 제때에 결실을 맺게 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예수께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마음 자세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당신 말씀의 운명에 관하여 우의적(寓意的)으로(빗대어)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풍작을 거두리라는 기대는 마지막까지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씨앗이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다.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 먹은 씨앗은 그런 씨앗을 관찰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심상이다. 유빌레오스의 책 본문(유빌 11,11)은 그 비유를 알아듣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마스테나 대장(사탄)이 까마귀들과 다른 새들을 보내어 땅에 흩어진 씨앗들을 먹어치우게 했다. 그래서 땅이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노동의 결실을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땅을 갈아서 씨앗을 잘 심기도 전에, 까마귀들이 땅 위에서 깍깍 짖어대고 있었다.” 

5-6절은 둘째 부류의 씨앗들이 어떤 처지에 떨어지는지를 더 자세하게 묘사한다. 이 씨앗들은 싹이 트는가 싶더니 곧 말라버리고 만다. 뿌리를 뻗을 수가 없어서다. 뿌리라는 심상은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온다(참조. 에제 17,1-8; 욥 29,19; 잠언 12,12; 지혜 15,3; 집회 1,20; 이사 11,10; 호세 9,16; 말라 3,9; 2열왕 19,30; 시편 80,10; 마태 15,13; 마르 11,20; 로마 11,18). 뿌리는 식물을 살아 있게 하고 지탱해준다. 땅만 좋으면 뿌리는 나무를 자라게 할 것이다.

셋째 경우에서는 씨앗들을 숨 막히게 하는 가시덤불에 대하여 말한다. 이 실패의 결론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것’이다.

씨앗들을 품어 한 개의 씨알에서 백 개의 씨알이 나오게 하는 땅은 어떤 땅인가? 4,3에 나오는 “자, 들어 보아라.”라는 표현은 신명 6,4에 나오는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 보아라.”)을 상기시킨다. 들어야 할 것은 운 좋은 씨앗들처럼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갈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효과를 낳고 풍성한 결실을 거두지만, 길에서 장애물을 만날 수가 있다. 이사 55,3.11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이 결실을 거두려면, 그 장애물을 치워야 한다. 땅은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땅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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