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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당신만은 영원히 계시나이다."- 2.1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2-15 조회수413 추천수5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2.14 주일      설                                              
민수6,22-27 야고4,13-15 루카12,35-40

                                            
 
 
 
 
 
 
"주님, 당신만은 영원히 계시나이다."
 
 


얼마 전 저희 수도원과 20여년 이상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
떼제 마르꼬 수사님의 말씀을 잊지 못합니다.
 
수사님이 처음 오셨을 때는 50대 후반이셨는데
지금은 우리 나이로 80세이시니 물처럼 흘러간 세월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있음’이 참 고맙습니다.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늘 그 자리에 ‘있음’이 너무 좋습니다.
  현대 수도자들에게 서원을 충실히 지키는 것은
  점점 힘들어 지는 추세입니다.
  얼마간 살다가 견디지 못해
 ‘있지’ 못하고 획획 떠나는 수도자들도 참 많습니다.”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바로 우리 수도승의 정주서원의 핵심을 말해 줍니다.

제일 중요하고 힘든 일이
무엇을 ‘하는 일’보다
언제나 그 자리에 깨어 ‘있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언제나 늘 ‘있음 자체’이신 하느님 중심의
제자리에 뿌리내리고 정주 영성을 살아가는 여기 수도승이요,
하여 땅의 현실에 깊이 뿌리 내린 나무들처럼 안정과 평화가 있습니다.
 
있어야 할 제자리의 중심에 있지 못해, 뿌리내리지 못해
불안과 두려움에 파생되는 우울증, 정신분열 등
온갖 심신의 질환들입니다.
 
현대인들의 영적 질병이라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움직이는 것,
조용히 침묵하지 못하고 계속 말하는 것,
모두 내적 불안과 두려움의 반영입니다.


‘있음 자체’이신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만나
그분 안에 머무를 때 비로소 허무의 어둠은 걷히고 안정과 평화입니다.
 
마치 밤의 어둠을 환히 밝히며 떠오르는 태양이
바로 있음 자체이신 주님을 상징합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 마음의 태양이신 주님이십니다.
 
이 주님을 만나지 못해,
주님 안에 머무르지 못해 허무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 야고보의 말씀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무능하고 무력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명 역시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가는
한 줄기 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풀잎에 달린 이슬방울 같다하여
혹자는 우리 인생을 초로인생으로 견주기도 합니다.
 
참 허무한 인생입니다.
 
한계 상황에 처할 때마다 누구나 느끼는 실존적 체험입니다.

허무와 절망의 어둠에서 시작되는 죽음이요,
영혼의 치명적 질병 같은 허무와 절망입니다.
 
허무와 절망에 감염되면
곧장 ‘무(無)’자와 ‘불(不)’자가 든
어둠의 세력을 뜻하는 낱말들이
우리 공동체를, 내 삶을 차지해 병들게 합니다.
 
무기력(無氣力),
무의미(無意味),
무감동(無感動),
무감각(無感覺)과 더불어
활력을 잃고
불화(不和),
불편(不評),
불만(不滿),
불행(不幸)과 더불어 공동체나 삶은 분열되고 복잡 혼란해 집니다.
 

삶의 허무나 절망은 우리 삶의 기로입니다.
 
무너질 수도 있고 도약으로의 비상일수도 있는 기로입니다.
 
허무와 절망은 바로 ‘있음 자체’이시자
‘빛과 생명의 원천’이신, ‘믿음, 희망, 사랑의 원천’이자
‘진선미(眞善美)의 원천’이신 주님께로 오라는 초대장입니다.
 
어둔 구름이 걷히면 빛나는 태양이듯이
허무와 절망의 베일이 벗겨지면 생명으로 빛나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만날 때
허무는 충만으로,
어둠은 빛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순간은 영원으로 바뀝니다.
 
무기력, 무의미, 무감동, 무감각, 불화, 불평, 불만, 불행의 낱말에서
‘무(無)’자와 ‘불(不)’자는 모두 떨어져 나가
활력 넘치는 깨어 살아있는 삶,
감사와 찬미의 행복한 삶으로 변합니다.
 
빛나는 생명의 태양이신 주님이 우리 안팎의 모든 어둠을 몰아냅니다.
 
지금 여기가 영원한 하늘나라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 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야고보의 말씀처럼 주님을 만날 때 제 한계를 아는 겸손입니다.
 
얼마 전 말씀드렸다시피 지옥은 한계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어 주실 때
안과 밖의 한계가 환히 드러나
분별의 지혜와 겸손으로 한계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계신 주님을 만날 때 깨어 기다리는 삶입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목말라 깨어 기다리는 삶,
바로 이게 우리 영적 삶의 역설입니다.
 
하여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우리의 삶입니다.
 
이래서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는
시(詩)도 태어났나 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진정 행복한 이들은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깨어 있게 되고
또 영혼의 등불 환히 켜들고 주님을 기다리게 됩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빛이신 주님을 향해 활짝 열려 있음을 뜻하며
이 자체가 주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온 누리에 내려 쏟아지는 햇살 같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주님께서는 깨어 당신을 기다리는, 바라보는 이들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평화를 베푸십니다.
 
바로 주님은 당신 앞에서 깨어
고요히 묵상하는 이들,
기도 바치는 이들,
미사를 봉헌하는 이들에게 이런 축복을 주십니다.


어제 성가 연습 중,
시편 90편을 바탕으로 한
가톨릭 성가423장 내용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대로 오늘 강론과도 연결됩니다.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마치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나이다.
  당신이 앗아가면 그들은 한 바탕 꿈 아침에 돋아나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피었다가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서 말라버리나이다.
  사람을 진흙으로 돌아가게 하시며 인간의 종락들아 먼지로 돌아가라.”

여기까지 보면 허무이지만
후렴을 보면 빛과 생명이, 믿음과 희망, 사랑이 약동합니다.
 
매 구절마다 후렴이 확고히 중심을 잡아 줍니다.

“주여, 당신만은 영원히 계시나이다.
  주여 당신만은 영원히 계시나이다.”

이 후렴이 없다면
누구나 숙명주의, 비관주의, 허무주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계신 주님만이 우리의 힘이요 위로입니다.
 
영원히 계신 주님 안에 머물 때
허무는 충만이 되고 절망은 희망이 됩니다.
 
죽음의 어둠은 생명의 빛으로 변합니다.
 
생명과 빛, 희망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도 사랑의 주님은
허무하고 덧없는 존재인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서
영원히 사시고자 당신의 말씀과 성체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이 좋은 설날,
주님은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의 복을 내려주시고,
여러분 모두를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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