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 성월을 맞아 1. 위령성월의 기원과 의미 위령성월은 가톨릭 교회에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달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위령의 날(11월 2일)과 연관시켜 11월을 위령성월로 정해 놓았다. 이 달에는 특히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나 친지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게 된다. 한편 11월 2일 위령의 날에는 세상을 떠난 모든 신자들의 영혼을 기억하게 되는데, 998년 일년에 한번씩 위령의 날을 지키도록 명령한 클뤼니 수도원의 오딜로(Odilo)의 영향으로 보편화되었다. 2.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에 대하여 :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죽은 부모나 형제, 친지들을 위해 제사를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면서 조상들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왔다. 이러한 정신은 가톨릭 교회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교회 역시 오래전부터, 특히 4-5세기경부터 교회의 핵심적인 신앙을 모아놓은 사도신경 안에서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하며 성인통공 교리를 믿어왔다. 이 성인통공 교리는 교회를 이루는 세 구성원들, 즉 세상에 살고 있는 신자, 천국에서 천상의 영광을 누리는 이들(모든 성인의 날 참조), 그리고 연옥에서 단련받고 있는 이들(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새롭게 선업을 쌓을 수는 없다. 그래서 지상에 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희생이 더욱 필요하다) 사이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것으로, 이들이 서로의 기도와 희생과 선행으로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교회의 신앙에 의하면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만남은 결코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고립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죽은 이를 위한 교회의 기도에는 바로 죽은 신자가 살아있는 신자들의 연대성으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는다는 희망이 드러나고 있다. 죽음 속에서, 스스로는 자신에게 어떤 의지도 부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인간 뒤에 그를 지탱시켜 주는 교회의 청원기도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사랑의 한 가지 모습,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적 연대성의 공표로 이해할 수 있다. 3. 연옥 교리에 대하여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과는 달리 연옥신앙을 갖고 있다. 이것은 1336년 교황 베네딕도 12세에 의해 믿을 교리로 선포되었다. 교리 결정에 따르면 성인들은 죽은 후에 즉시 천당에서 지복을 누리게 되는데 비해, 아직 정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정화된 뒤에 비로소 천당에서의 지복을 누리게 된다. 트렌트 공의회 역시 1547년에 반포된 "의화교령"에서 현세 이후에 연옥이 있으며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신자들의 기도의 도움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실 연옥이란 말은 성서에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암시적인 구절들이 있을 뿐이다. 그중 1고린 3,12-15에는 살아있을 때에 과오를 범한 사람은 사후에 "불을 통과하는 것과 같이", 즉 노고와 곤경을 겪으면서 비로소 구원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연옥교리는 이미 교부시대에 이르러 분명하게 정착되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도움이 주어질 수 있다는 확신이 성인들의 통공 교리에 수용되었다. 우리는 흔히 연옥이라고 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무서운 형벌을 받는 어떤 장소, 반지옥과도 같은 장소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자들은 이보다는 연옥을 하느님과의 만남의 과정과 정화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무한하게 선하시고 완전하신 하느님 앞에서 피조물 인간은 언제나 부족하고 부끄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그러한 인간이 죽어서 하느님을 뵙는 것은 그 자체로 정화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 앞에서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 때문에 한없이 송구스럽고 또한편 고통스럽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 자신, 하느님과의 만남이 바로 연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연옥은 완성되지 않고 사랑 속에서 성숙되지 않은 인간이 무한히 거룩하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의 한 순간이다. 연옥은 우리가 겪게 되는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그래서 정화되는 하느님과의 만남인 것이다. 4. 위령성월을 지내는 신앙인의 자세 위령성월은 기본 바탕은 하느님 백성간의 사랑과 유대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랑의 유대는 예수님께서 첫째가는 계명으로 또 새 계명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의 계명은 비단 이웃사랑만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공을 초월하여 이미 죽은이들과의 사랑의 유대로도 뻗어나간다. 그러므로 위령성월의 근본정신은 사랑의 정신이요 하느님 백성 전체를 향한 한없는 사랑의 표현이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정신의 표현이요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공동체성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산이와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이들을 위해 사랑의 행위와 희생을 쌓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이것이 위령성월을 맞는 우리 신앙인들의 자세이여야 한다. 나 혼자만의 구원은 있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한 개인의 구원이 아닌 백성의 구원, 즉 공동체의 구원을 원하셨다. 또 이를 위해서 당신의 외아들마저 이 세상에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무참히 죽는 고통마저 감수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이라면 나보다는 이웃을 위해 사는 사랑의 사도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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