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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을 경험하는 삶 / 교만의 종류 / [복음과 묵상]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09 조회수559 추천수13 반대(0) 신고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만군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자비의 하느님, 오늘도 저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며 주님의 구속사업의 도구가 되게하시고 평온한 죽음을 맞게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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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하느님을 경험하는 삶


뛰어난 리더십 전문가인 헨리 블래카비는 그의 책에서 하느님의 본질에 대해 세 가지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특성은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1.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 그분의 뜻은 항상 최선이다

하느님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은 항상 우리에게 최선을 주시는 사랑이십니다. 완전한 사랑은 결코 차선을 줄 수 없습니다. 본질상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최선만을 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것이 바로 이것을 증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이 사랑임을 믿는다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 항상 최선이라는 사실을 또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인 하느님의 계명들 또한 우리에게 최선을 이루시기 위해 주신 것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2. 하느님은 전지하시다 : 그분의 인도하심은 항상 옳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압니다. 과거, 현재, 미래 그 무엇도 하느님의 지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 그 분의 인도하심은 항상 옳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옳은가 혹은 최선인가를 물어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뜻이 최선이듯이 하느님께서는 전지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뜻은 항상 옳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옳다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분의 뜻에 순종하십시오. 순종은 그분의 뜻이 항상 옳다는 것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줄 것입니다.


3. 하느님은 전능하시다 : 그분은 당신이 그분의 뜻을 성취하게 하실 수 있다

하느님은 못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무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였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엄청난 비극을 인류를 위한 놀라운 구원으로 바꾸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은 열두 제자들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는 일도 행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못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신다면, 그분 자신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한다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힘과 통찰력과 기술과 자원을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하느님께서 전지하시고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신뢰하십시오. 그러한 신뢰를 가지고 그 하느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뜻과 열어가시는 상황에 순종하도록 하십시오.

(국제제자훈련원의 글 중에서 명칭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교만의 종류


윤리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는 인간에게 있는 교만을 네가지로 나누었다.

첫째, 권력적 교만(Authority pride)이다.
낮을 때는 겸손 하지만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이 생길수 있다.

둘째, 지적 교만(Intelligent pride)이다.
모를 때는 모르기 때문에 겸손할수 있지만 알게되면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게 되고 자기만 똑똑한 줄로 생각한다.

셋째, 도덕적 교만(Moral pride)이다.
부도덕 할때야 별수없이 조용히 지내지만 조금이라도 도덕적으로 내세울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부도덕하게 보고 자신을 높이 평가한다.

넷째, 영적 교만(Spiritual pride)이다.
자신의 신앙적 행위라든지 기도, 성경읽기, 봉사 등이 다른사람과 비교해서 조금이라도 나은 점이 있으면 그걸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만큼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형편없이 보는 경우이다.




[3월 10일] 지극히 거룩한 생명의 말씀 '복음' <마태 5,17-19>

[오늘의 묵상 - 신은근 바오로신부님, 마산 호계성당]


[복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


[오늘의 묵상]
법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몸은 움직여도 마음은 따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동과 감격이 있어야 몸과 마음도 ‘함께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규칙과 법규가 많은 조직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자율과 투명성이 앞서야 ‘살아 움직이는’ 조직이 됩니다.

율법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님을 천명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율법에 매달리는 행위를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매달리면 폐쇄적인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찌 율법뿐일는지요? 무엇이든 거기에 ‘목을 매고’ 살아가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계율이고, 사람을 위한 계명입니다. 이것을 망각했기에 엉뚱한 방향으로 갔습니다. 유다인 역시 몰랐기에 율법을 ‘글자 그대로만’ 지키려 했습니다. 숲을 못 보고 나무만 본 셈입니다. 어떤 법이든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사람을 법에 ‘옭아맨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조직이든 단체든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은 언제나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려고 단체에 가입했는데, 그 안에서 ‘상처를 받는다면’ 곤란한 일입니다. 더구나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고 있다면 바리사이의 조직과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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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 

(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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