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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82) 제7처 기력이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니다.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13 조회수377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0년3월13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호세아6,1~6; 루카18, 9~14 -  
 
 
 
(482) 제7처 기력이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니다.
                                                                                             이순의
 
 
아침도 아닌 오후 늦게 홀연히 기차를 타러 간다고 가버렸다. 걱정은 되었지만 느닷없이 서울역에 전화를 하더니 여행상품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다녀오겠다고 가버렸다. 어디가 되었든지 깊은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자식의 밤을 생각하며 잠을 청하지 못하였다. 그 발 닿는 곳이 어디건 간에 등 펴고 누웠다는 연락이오면 잠을 잘 것 같았다. 혼자 떠나는 첫 여행이라서 숙박하는 장소도 신경이 쓰였고, 낯선 도시의 밤은 얼마나 또 낯설까 싶어서 기차가 어디쯤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의지할 곳은 켜둔 촛불뿐이었다. 그 초의 심지에서 가물거리는 불꽃 한 점이 자식의 밤길을 밝혀주기를 빌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마도 섬이 아닌 육지의 끝쯤인 기찻길의 종점에는 다다랐을 것이라고 믿는 시간쯤에 문자를 보냈다.
 
<무엇이 그렇게 근심케 하였더냐?>
 
어른들은 하루 세 끼 밥 먹고, 매일 밤 잠자고, 아이들 키우고, 생활을 하느라고 근심하는데 자식들은 부모 품에 있으면서도 무슨 근심이 그렇게 많은 것일까? 부모가 밥도 먹여주고, 부모가 잠도 재워주는데 무엇을 근심하느라고 한 번도 홀로 떠나 본 적이 없는 야간여행을 감행 한다는 말인가? 군대 입대하던 날에 입영장정 집합명령하던 때 소년에서 청년으로 탈바꿈 하려는 슬픔들이 등을 돌리고 서서 코끝 붉어지더니, 그 밤에 다시 어미에게 등을 돌리고는 홀연히 떠나버렸다. 문자를 보내도 쉽게 답장이 오지 않았다. 문자가 찍혀 올 휴대전화기에 눈동자를 찍고 있을 때 문자대신 전화벨이 울렸다. 애타게 기다리던 자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여기 호텔인데요. 하루 숙박비가 26만원이라는데 안되겠지요?>
참! 자식이 걱정스러워서 기다릴 때는 언제고.......!
 
뒤 꼭지가 팽 돌았다. 참자! 참자! 참자! 너 이 녀석, 그 따위로 여행 하려고 기차타고 갔냐? 라고, 그 따위로 여행 하려고 밤중에 어미한테 등 돌리고 갔냐? 라고, 목구멍에서 돼야지 맥 따지는 소리가 터지려 한다. 참자. 참자. 참자. 
<그래. 처음 하는 여행인데 거기서 잠을 자면 좋겠지만 다른데 좀 알아봐.>
<네. 어머니!>
대답은 간단했고, 쉽게 끊어졌다. 그리고 호텔에서 나왔는지 이내 다시 전화가 왔다. 부산행 열차에서 내려 무턱대고 택시를 탔단다. 해운대로 가자하였더니 택시 기사님께서 좀 농이 지나치셨던가보다. 젊은 청년이 야간열차에서 내려 해운대 밤바다를 가자하였으니 여러 가지 메뉴를 제시하였던가보다. 백인에서 황인 흑인까지, 늘씬녀에서 통통녀까지, 동남아에서 유러피안까지! 구미대로 대령해주시겠다는! 그러니 덜컥 겁이 났고, 달리는 택시 안에서도 보였을 만큼 큰 오성급 호텔의 간판만 보고 그 앞에서 내려 달라고 하는! 택시 기사님이 보더라도 당당하게 호텔로 들어갔단다. 그리고 숙박비를 알아보고는 놀라서 전화를 했고, 지금은 다른 여각을 찾아보고 있다고 걱정 마시라는 알림이었다.
 
좀 더 일찍 나대며 놀게 둘 걸 후회도 되었다. 사내자식은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세상어디에서도 동가숙 서가식 하게 키워야 한다는데 그러지를 못하였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커피를 배워서 일하고, 이탈리아를 가서 바티칸 마당에 엄지발가락만이라도 찍어보고 오겠다는 녀석이 이 무슨 돌발적 행각이라는 말인가?! 군대를 다녀왔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 최면을 걸며 야행을 떠난 아들의 새가슴이 어찌나 작아보이던지! 부산이라는 항구도시는 군대시절에 발을 디뎌 보았다지만 밤중에 홀로 걷고 있다하니 또 걱정이 되었다.
<마리아 수녀님께서 해운대 근처에 계시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그쪽으로 연락해라.>
이것이 목적지도 없이 떠난 자식에게 내린 어미의 긴급처방전이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성지순례 왔습니까? 아직도 자식이 왜 밤차를 타고 길을 떠났는지를 모르십니까?>
어휴! 참자! 참자! 참자! 참자. 참자. 참자. 알았으니 밤에 돌아다니지 말고 어디가 되었든지 여각에 들라고 부탁을 해야만 했다. 
 
<무엇이 너를 너를 그렇게 그렇게 근심케 하였더냐?>
 
어미 생각에는 휴학도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했으면 좋겠는데,  커피도 배우지 말고 영어 토익 점수 올릴 대비나 했으면 좋겠는데, 로마는 어른이 되어서도 얼마든지 갈 수 있으니까 다 접어두고 편입시험이라도 좀 해서 한국 사회의 일류병인 대학에라도 줄 바꿔 탔으면 좋겠는데, 어미가 마음에 드는 짓은 다 거절하고 제 마음에 드는 짓을 하려는데 그 또한 정체성이 희박한가 보다. 어미도 어미 인생을 모르겠는데, 어미도 어미의 길을 몰라서 헤매다가 지금 여기에 서서 공염불을 하고 있는데, 자식이 자식의 인생을 모른다하고, 자식이 자식의 길을 모른다한다. 아~! 어쩌란 말인가 이 아픈 가슴을~! 아~! 어쩌란 말인가 이 아픈 마음을~! 태중에서부터 어미의 가슴에 담아 둔 몫은 어미 맘이 아니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라서, 감히 입에 뻥긋도 못하고 있는데, 제 녀석은 제 녀석대로 하느님 맘을 엄마 맘대로 한다고 입에 뻥긋도 못하게 한다. 
 
참으로 어렵고 고달픈 등불이 되어 해운대 어디쯤의 골목에서 아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마음만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그저 시공을 초월한 영적인 힘을 동원하여 자식의 곁에서 잠들 곳을 찾아 헤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마음에 맞는 방이 있다면 자식을 따라 투숙할 것이고, 그곳에서 잠든 자식의 고단한 가슴을 어루만져 줄 참이었다. 휴대전화기에 자식의 표시가 울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어미의 타는 바람은 너무 짧은가 보다. 아직도 여각을 찾고 있으려는지? 소식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보낼 것이었다. 서울과 부산이라는 시공을 초월하여 어미가 읽는 자식의 현재 상태를 읽어주고 싶었다. 장문의 문장을 휴대폰에 써서 보냈다.
<아들! 제일로 아들 자신에게 화내지 마세요. 아들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세요. 여행은 환상이나 즐거움이 아닙니다. 화나는 나를 극복하면서 현재 나의 위치를 알아가는 것이고, 실망스러운 나를 일으켜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대담한 마음이기를 바랍니다. 본 것이 없는 여행이라 해도 화나는 자신을 극복하고 오시면, 실망스러운 자신을 발견하고만 오셔도, 그 자체로서 여행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부여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에서 나를 보고 나를 발견하고 나의 모습을 인정하고 그런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용기를 줄줄 알면 됩니다. >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 종이에 쓴 원고를 들이밀었다. 제목부터 엄청 거창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 의지론을 뒷받침하는 글>
자유의지론을 읽고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1%가 부족한 것을 느꼈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 그 1%의 답으로 자기가 증명할 이론을 알아왔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신학적 텍스트에 대하여 어미가 자식의 의견을 함부로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평가할 수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신중하게 그리고 정중하게 아들이 건네주는 텍스트를 읽었다. 신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를 증명하라고 한다면 증명 그 자체가 어리석음이라는! 그러므로 증명하려 하지 말고 신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성인의 정의에 대하여 고민한 흔적들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인간의 무지함은 무조건 믿는 신앙에 반하여 증명과 이론이 뒷받침 되어져야 한다는 명제가 정의되어져야 한다는 제 나름의 이론이었고, 그 해답들도 나름 정리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자유의지론을 완독하였는지를 물어보았다. 다행히 완독하지는 않았고, 독서 중에 타오른 열정이었던 것 같았다. 돌아 온 자식에게 반가움을 표시할 겨를도 없이 받아든 내용에 대하여 답변을 미루었다. 좀 더 신중히 생각하고 응답해야할 책임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어미의 소견을 진짜로 듣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진짜로 듣고 싶다고 하였고, 무엇보다도 그 작은 필기로 스스로에게 여행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조건이 필요했다. 자식이 여행의 보람과 직결시키고 싶은 내용의 답이라면, 혹시 어미의 생각이 쓴 소리가 되었을 때 상처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앙의 문제에서 개인적으로 아무런 철학이 없는 엄마인 상태와 이제 제 자리를 잡아가는 아들의 상태 사이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무엇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어미의 말이 칭찬이 아니더라도 가볍게 외출하고 돌아 온 것처럼 가볍게 참고만하기로 약속을 받아내야 했다. 그러고도 아들은 어미의 생각을 꼭 듣고 싶어 했다. 엄마가 보내 준 문자! <자기 자신에게 화내지 말라.>를 받고 황당했었다는! 왜 엄마가 이런 문자를 나에게 보내는지 몰라서 그런걸 보냈다는 사실이 더 화가 났었다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에 홀로선 자기를 보게 되었고, 빈! 텅 빈 자아! 부모님께서 주신 여행경비가 아니면 지금 나는 이 자리에서 무엇을 먹을지에 대하여 부터 생존의 법칙 하나하나 까지 모두가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그때서야 어머니의 문자를 다시 읽게 되었고, 그 의미를 깨달았다는! 그래서 더욱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 의지론을 뒷받침하는 글에 대한 평가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미의 어떤 말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조건이었다.
 
딱 잘라서 세 가지로 구분을 해 주었다.
1 - 지금의 너는 신앙인이지 신학자가 아니므로 신학이라는 정의에 대하여 누구와도 논하지 말거라. 앞으로도 신앙인으로만 살 것이라면 그냥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처럼 이론도 세우지 말고 정의도 내리지 말고 그냥 믿어라. 주님은 그냥 믿어야 한다. 그러나 네가 신학자로 나서야 할 소명이 주어진다면 네 영혼과 네 정신을 다해 모든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타 종교인들에게도 전능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하여 전파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 전에는 절대로 논쟁하지 마라. 오류는 곧 이단을 낳는다.
 
2 - 엄마가 본 지금 아들의 상태에서 이만큼의 생각을 꺼내서 글로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면 감사하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이 말은 정말로 명심해 두어라. 너는 네가 이 만큼을 정의할 수 있었다면 너는 신을 이만큼 배신할 수도 있다. 인간은 교만한 동물이며, 자유의지를 태초에 배신한 경험이 있다. 자신이 신에 대하여 아는 만큼 신을 속일 수도 있고 배신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신학에 대하여 너에게 어떤 정의가 성립이 된다하더라도 네가 가진 그 정의가 네 믿음의 적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라. 너는 네가 신에 대하여 아는 만큼 네가 신을 배신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어떠한 경우라 해도 네가 신을 향한 순종일 것이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한결같은 믿음이다.
 
3 -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했지 나를 연구 하라고 하신 적이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연구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서 제 십자가를 지고 가야합니다.>
시대가 쌀 한 톨을 일구고 가꾸어서 밥을 먹는 시대가 아니다. 컴퓨터의 단추 하나만 잘 눌러도 쌀 수 억 톨을 사고도 남아돌 만큼 가치의 기준이 달라져 있다. 이 말은 쌀 한 톨을 가꾸는 농부의 땀의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쌀을 사는 입장의 기준은 전혀 달라져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농부의 삶은 각박하여졌으나 쌀을 사는 쪽의 입장은 그까짓 쌀이 되는 관념의 변화! 농부가 컴퓨터는 못해도 밥은 먹을 수 있지만 컴퓨터 단추를 눌러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사람은 쌀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한다. 그런데도 시대는 농군은 천하여졌고, 산업은 끝이 보이지 않게 발전하고 귀하다. 신앙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추기경님의 말씀처럼 신학의 명제를 정의할 수 있는 입장들이 우세할지는 모르나 그 신학을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농군과 같을 것이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삶으로 산다는 믿음은 신학을 몰라도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양식이나, 신학은 믿음 없이는 존재하지 못할 도구적 양식일 것이다. 그러므로 김수환 추기경님의 지극한 영성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주님을 연구하지 말고 주님을 따라서 살라 하신!
 
부모가 된다는 것은 수없이 거쳐 온 자기 실수를 자식에게만큼은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길잡이와 같다. 그러나 자식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길에서 낡은 부모의 경험을 그대로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 제 스스로 넘어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아파 보아야 크는가 보다. 자식이 자식의 인생을 놓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답은 간단하다. 고민할 시간에 영어단어라도 하나 더 외우고, 걱정할 시간에 뒤져라 공부하고, 기차타고 어데 갈 시간 있으면 일류기업 빌딩구경이라도 좀 하고 침이라도 흘려보던가? 그런데 자식이라는 게 제 어미를 닮아서 그런지 개똥철학은 다 하고 다닌다.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놈아 개똥철학을 해 보았자 배만 고프고 가난하기만 하더라. 일찍이 돈에 눈 뜨고, 이익에 밝아야지, 혼자 홀연히 떠났다가 돌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뭘 뒷받침 한다 더냐? 이놈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를 못하고 개똥철학에 개똥철학으로다가 답을 해 주었다. 만족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엄청이루다가 진지~이 하게 듣기는 듣는 모습이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자꾸만 넘어지는 자식을 일으켜 세워주시는 응답으로 선택하신 말씀이라고 믿고 싶다. 말은 내 입에서 나왔으나 자식의 내면세계를 일으켜 세우시는 응답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러나왔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자식이 무사히 돌아와 어미 곁에 앉아 있음이 탄복할 만큼 감사할 밖에!
†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호세아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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