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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14일 야곱의 우물- 루카15,1-3.11-32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14 조회수373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1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시는군요.’
 
31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시작 기도
하느님 ‘아빠, 아버지’, 성령의 이끄심을 통해 우리 마음을 당신이 계신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독서
루카 15, 11 – 32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는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15, 1 – 2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행동이 하느님이 행하시는 일에 비추어 볼 때 올바른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계속 불평하는 바리사이들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전반부는 집을 떠난 작은아들 (12 – 24절), 그리고 후반부는 집에 남아 있는 큰아들(25 – 32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겪는 삶의 구체적 모습은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나” (13절)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마지막에는 거지가 되어 돌아옵니다.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20절)라는 묘사에서, 아들이 아직도 집에서 멀리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큰아들은 항상 아버지 집에 있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자기 것을 챙겨 아버지의 집을 떠나려는 마음도 품지 않고, 늘 집 가까이 ‘들’ 에서 일합니다(25절). 집안에서 벌이는 잔치소리를 들을 때 집에 뛰어들어 가기보다 먼저 하인을 불러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묻습니다(26절). 우리는 그의 태도를 통해 늘 집에서 살지만, 집이 언제나 돌아가서 편안하게 쉬고, 사랑과 힘을 받는 곳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아들 사이의 서로 반대되는 삶의 결말은 본문에 짧게 담겨 있습니다. 집에서 멀리 있던 아들은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는 것을 말하려고 출발하여 집으로 돌아오고 (19 – 20절), 늘 아버지 가까이 있던 큰아들은 작은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이 불공평하다고 여겨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28절).

너무나 대조적인 두 아들에 대해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봅시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아직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도 집 밖으로 달려가 그를 껴안고 환영하면서 잔치를 벌입니다. 나아가 큰아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으려 하자 그를 달래기 위해 또 집 밖으로 나가 달래면서 잔치에 함께 참여할 것을 권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1절) 집을 떠나 다른 세상에서 제멋대로 산 작은아들이 집에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부드러운 사랑을 충만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큰아들의 냉담함과 계속되는 거부도 아버지의 인내에 찬 사랑을 표현하는 기회가 됩니다.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에게 똑같이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15, 24.32). 이렇게 이 이야기의 주제는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인데, 돌아온 아들을 반기는 아버지의 커다란 기쁨과 포옹, 그리고 불평하는 큰아들도 잔치에 초대하여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기다림과 인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작은아들은 세리와 죄인들, 늘 순종하면서도 불만에 가득 찬 큰아들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상징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입으로는 하느님을 예배하면서도 사랑에 가득 찬 하느님의 마음에서 멀어져,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 때문에 예수님한테서 자주 비판받습니다(루카 11, 37 – 52; 20, 46; 마태 23장). 예수님은 큰아들도 타일러 잔치에 참석하게 하려고 애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바리사이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큰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집에 들어가 동생과 함께 잔치를 즐겼는지는 본문에 없어, 그가 아버지 사랑의 본질을 그대로 깨달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루카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큰아들과 작은아들도 모두 구원될 것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죄인들이 우선 대상이지만, 동시에 모두에게 차별 없이 열려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구원하는 힘과 사랑은 작은아들에서 출발하여 모든 이에게 도달합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영성적 의미입니다.

성찰
오늘 말씀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로 느끼려면 우리가 딸과 아들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통해 형제와 자매가 된 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초대교회가 깊이 성찰했음을 보여줍니다.

기도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신다.(시편 34, 19)
임숙희(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 성서영성 신학박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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