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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14 조회수699 추천수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0년 3월 14일 사순 제4주일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against you;
I no longer deserve to be called your son.’
But his father ordered his servants,
‘Quickly bring the finest robe and put it on him;
put a ring on his finger and sandals on his feet.
Take the fattened calf and slaughter it.
Then let us celebrate with a feast,
because this son of mine was dead, and has come to life again;
he was lost, and has been found.
(루가 15,1-3.11ㄴ-32)

 

 
 한 청년이 홧김에 실수로 살인을 범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의 아버지는 주지사를 찾아가 간절히 애원을 했지요.

“제 아들이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원래는 착한 아이입니다. 성격이 급해서 그러한 실수를 했으니 부디 사형만은 면하게 해주십시오.”

주지사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겸손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이 사형수 역시 본성은 착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면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사면장을 안주머니에 넣고 감옥에 갇힌 청년을 찾아갔지요.

“여보게, 정말로 만약인데……. 자네가 사면을 받아 자유로운 몸이 된다면 지금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주지사의 이 말에 청년은 매우 화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두 사람을 죽일 것입니다. 사형을 선고한 판사와 내게 불리한 증언을 한 증인. 이렇게 두 사람을 말이지요.”

이 말을 들은 주지사는 과연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이 사형수에게 사면장을 주었을까요? 아닙니다. 사면장을 가슴에 그대로 품은 채 조용히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만약 이 사형수가 남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면이 되어 다시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에 대한 원망으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사형수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그 사랑을 오늘 복음의 탕자의 비유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합니다. 사실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으니, 유대의 율법을 따른다면 많아봐야 17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살아계시는데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사랑으로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해줍니다.

유산을 미리 받은 둘째 아들이 잘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아쉽게도 방종한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종한 생활은 결국 둘째 아들을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재산을 탕진한 것은 물론 그 고장에 기근이 들어서 곤궁에 허덕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살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돼지를 치는 일까지 하게 됩니다. 특히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기를 바라는 그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천해진 상황이라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극도로 비참한 상태에 빠진 사람은 두 갈래의 길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절망에 빠지거나 아니면 또 다시 일어서 보자는 희망적인 용기를 갖는 것…….

특히 절망에 빠진 사람은 자살하거나 인생을 포기하고 막가는 악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바로 둘째 아들 역시 극도의 비참한 상태에서 절망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게 됩니다. 아버지 안에서 희망적인 용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를 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둘째 아들과 같은 상황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강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망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의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 만약 모르겠다면, 그 사랑을 기억하기 위한 노력을 아까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 안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사면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마세요.

 

마음속에 있는 은종을 울리세요


 옛날의 어떤 왕이 보위에 오르면서 궁전탑 꼭대기에 아름다운 은종 하나를 설치했습니다 그 이유는 왕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낄때 종을 울림으로써 백성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지요. 특별히 그는 자신의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 찼을 때만 그 종을 치기로, 그것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손수 종을 친다는 규칙을 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아름다운 종소리는 단 한번도 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새 왕도 늙고 병들어 이 세상을 하직할 시간이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왕을 둘러싸고 있던 신하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흐느끼기 시작했지요. 그 순간 왕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며 백성들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갑자기 자신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은종을 치고 행복한 미소를 띤채 숨을 거두게 되었답니다

만일 그 왕이 진작 백성들의 사랑을 깨달았더라면 시종일관 행복한 삶을 누렸을 것이며 백성들도 날마다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을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 자신도 그 왕과 다를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우리 역시 우리를 향항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의 사랑을 깨닫기만 한다면 언제나 행복을 누릴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유년기를 거쳐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에 이를 때까지 얼굴에 근심의 주름살만 깊게 패일뿐 행복의 은종을 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완전한 행복과 평안이 숨어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끼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글을 보고 계시는 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얼마나 자주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은종을 울리고 있습니까? 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여러분도 자신을 향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나는 불행해.나에게만 왜 이런 시련이 있을까?'라고 한탄만 하면서 마음속에 은종을 오래 묵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Ernesto Cortazar - Eternal Love Af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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