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483) 제8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21 조회수427 추천수10 반대(0) 신고
 
2010년3월18일사순 제4주간 목요일 부터 써서 2010년3월21일 사순 제5주일에 완성합니다. -이사야43,16-21;필리피3,8-14; 요한8,1-11-
 
(483) 제8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이순의
 
어린 싹이 귀여운 재롱 춤을 추려하는데 춘설이 찬 기운을 끼얹고 있다. 캄캄한 봄밤에 성모성심께 드리는 묵주의 기도를 바치고 오는데 가지마다 설화가 피어 가로등 불빛에 반짝인다. 겨울 가시고 봄 오시기도 이렇게 어려운가 보다. 그래도 봄이라서 그런지 이른 봄에 내리는 눈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사진 찍기를 즐겨하는 사람의 입장은 봄밤에 내리는 설화가 아침에도 기다려 주실 지를 가늠하여 본다. 이것이 인간의 이중성이다. 섬 집에를 가려고 여러 번 날을 잡았는데 자꾸만 자꾸만 날씨가 나빠져서 미루다가 봄이 되었다. 내일이면 새로 지은 산골성당의 축성식에 갔다가 돌아오는 대로 섬 집에를 가기로 했는데 이 밤에 눈이 내리고 계시니 근심이 앞선다. 그러다가도 밤이 지나고 아침에도 이른 봄의 설화를 볼지에 대하여 욕심을 부리고 있으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실지 자연께서도 아리송하실 것이다. 나도 모르겠다. 산골에도 다녀와야 하고, 섬에도 다녀와야 하고, 춘설의 사진도 찍고 싶고, 3월도 중순을 넘어 할 일은 밀려오는데 속도가 늦춰지니 걱정이 앞서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신 길에서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위로 받으심이 아니라 위로하심이라고 한다. 잘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왜 위로나 동정심을 받지 않고 위로를 하셨는가? 개인적으로는 시몬에게 도움을 받고, 베로니카에게 닦임을 받고, 그런데 유독 군중 속의 여인들에게서는 위로를 받지 않으시고 위로를 하심이던가? 여인들의 입장에서도 이해가 잘 되지 않고, 고통의 주님 입장에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약한 한 인간이신 주님과 강한 군중인 여인들의 입장의 대비를 놓고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나 혼자인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주님의 위로가 전달되는데 함께하는 여인들 중에는 반드시 나와 다른 입장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자고 크게 외친 사람도 섞여 있는데 어이하여 주님께서는 받으실 위로를 받지 않으시고 위로로 되돌려 주더라는 말인가?
 
본의 아니게 짝꿍을 따라서 살다가 보니 농작물에 손을 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까다롭기로 유명한 작물이고 보니, 배추처럼 모종을 심어 한 포기씩 이종하여 뽑으면 되는 것도 아니고, 무처럼 굵어서 한 개씩 팔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맨땅에 씨 뿌리고 사람 손을 빌어서 일일이 솎아줘야 하고, 잔 알갱이들을 한 개씩 잡아서 가지런히 짚 다발로 묶어야 하는데, 상추처럼 박스 작업이 가능한 것도 아니라서 인력 소비로 말하자면 으뜸일 것이다. 그런데다가 고랭지에서 총각무를 재배하여 대량 출하를 한 개척자는 짝꿍이 처음이다. 지금은 짝꿍의 뒤를 이어 동일 작물을 재배하는 분이 있지만 5년 전만 해도 짝꿍이 처음이었다. 간혹 소량으로 먹을 만큼만 재배하는 농가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만큼 가꾸기도 어렵고, 상품으로 만들기도 어려운 품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재배가 까다로운 만큼 출하도 어렵고, 작업과정에서 사람의 솜씨를 얻기가 쉽지 않다. 그 때문에 농산물 관련기관에서조차 상장품목(경매)으로 지정했다가 비상장품목(위탁판매)으로 해지 하고야 말았다. 그만큼 생산라인의 특수성에서 오는 어려움이 크다는 말이다. 지금 짝꿍이 이만큼의 고랭지 총각무 터전을 마련하는 데는 누가 뭐라고 해도 목숨과 맞바꾸다시피 하여 이룬 결과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주님께서 그 십자가의 길에서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신 의미를 깨닫게 된다. 작업반장들이나 용역업자들은 나의 처세에 대하여 입을 열지 않는다. 백가지 대우를 잘 하더라도 한 가지만 섭섭하면 그것으로 빌미를 잡으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을 쓰는 현장이고 보니 그 모든 입을 통일시키지는 못한다. 그래서 간혹 마음을 표시 해 오시는 분들이 있어서 알게 되는 사실들이 있다. 
 
개인 농장처럼 몇 명 안 되는 인력을 필요로 하는 소규모가 아닌, 대규모의 인력을 필요로 하는 농장 중에서는 나의 성의가 제일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일이야 어디를 가든지 요구하는 만큼 하루 해 채워서 하면 되는 일이고, 손에 익어서 늘 하는 노동이고 보면, 더 쉬울 것도 더 어려울 것도 없다고 한다. 날씨라도 궂으면 고생이고, 작업 조건이라도 좋으면 일이란 수월하고! 그러나 농장주들의 성품은 다 다르고, 시세의 변동이라든지, 날씨 변화 등, 여러 환경적 어려움에 따라 변할 수 밖에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생물을 다루는 농장주들일 것이다. 시간과 초를 다투는 신선도는 사느냐 죽느냐를 판가름 할 수밖에 없다. 공산품처럼 재고품도 없는 농산물은 변질과 함께 투자의 가치가 송두리째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 신선도와 상품성을 유지하지 못하면 고생의 결과도 없고 본전도 없이 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짝꿍은 고랭지에서는 상품으로 출하 되 본적이 없는 작물을 들고 고랭지에서 시작을 한 것이다. 그러니 감자 눈 따는 일은 눈 감고도 하는 사람들이 총각무는 가르쳐 줘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강원도에서 총각무를 처음 시작할 때, 출하를 앞두고 묶을 작업인부를 불렀더란다. 그런데 산속에서 호랑이 나온다고 오지 않아버린 것이다. 짝꿍은 2만평이나 되는 총각무를 출하하지 못하고 그대로 버리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니 그 토지 임대료며 씨앗이랑 솎음하는 인부 대금이며, 비료랑 약값이랑, 들어 간 투자비용이 몽땅 땅에서 썩어버렸다. 우리의 살림을 먹고 도망을 간 사람도 있었지만, 그 후유증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산으로 간 짝꿍의 어려움이 우리 가족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라도 땅끝 황토진흙에서 주로 생산되는 품종을 모래 마사의 강원도 고랭지에서 실패도 무지막지 하게 하였다고 한다. 일조량이라든지, 건기와 우기가 남쪽과 다른 계절의 적응이라든지, 수 없는 실패와 실패로 결실이 있기는 있었는데....... 그만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강원도에서는 작업을 할 수 없다고 하여 인력이 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 상실감을 이기고 살아서 가족의 품을 찾아들 때는 가장으로서 죽기보다 어려웠다고 한다.
 
그 결과로 다음 해부터 짝꿍이 제시한 조건은 파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10여 년 전, 당시로서는 대한민국의 어느 농장에서도 불가능한 대우를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나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10여 년 전의 대우를 작년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도 최고의 대우라고 정평이 나 있으니 당시의 임금이라든지 환율로 볼 때 짝꿍이 얼마나 엄청난 모험과 희생을 감당해야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강원도에 가도 호랑이가 나오지 않더라는 사실도 증명이 되어 있고, 그 파격적인 대우를 욕심내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짝꿍은 천성이 착하기도 하지만, 작업인력이 없어서 2만평이나 되는 자식 같은 곡식을 버려 본 마음은 변하지 않고 있다. 집에서 마누라와 자식은 돈이 없어서 죽게 생겼을 때도 작업인력들에게는 최고의 대우를 해 주었다는 사실을 내가 산에 가서 현장에 몸을 담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다. 그 인간의 마음 때문에 참으로 아파야 하고, 그 인간의 마음 때문에 눈물 흘려야 하고, 그 인간의 마음 때문에 삭혀야 한다.
 
모든 조건은 정하여진다. 용역이든 인력이든 정한 조건에서 충족할 때 오는 것이다. 다른 농장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나와 짝꿍의 철칙은 그 조건을 위반해 본 적도 없지만 위반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느끼는 방식이 다 다르므로 이런 공적인 공간에 사실적인 묘사를 하기는 조심스럽다. 그렇더라도 업계에서는 제일 잘 해 주는 사장님과 사모님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전해들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슬픈 경우들이 있다. 개인의 의견과 상관없이 인력을 움직이는 힘에 의해 등을 돌려버릴 때는 피를 토하고 자결할 지경이 된다. 내 곡식을 두고 인력들이 등을 돌려버릴 때는 헤로데가 따로 없다. 군중이 따로 없다. 내 곡식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한다. 죽을 수는 없어서 가야만 한다. 그런데 더 비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도 참고 견디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수고한 보수도 충분히 탔고, 입으로 들어 간 밥 한 톨부터 나와서 닦는 휴지 한 장 까지! 심지어 남기고 간 분뇨의 뒤처리 인 정화조 푸는 삯까지 다 해결해 드린 것도 모자라서, 이유없이 다음 작업은 오지 않겠다는 벼락같은 통보를 받기도 한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경쟁자들 간에 간혹 있을 수 있는 장난질이라서 감당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정도의 인력 다툼은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풍경이다. 이것이 오늘 날 농업의 현실이고, 이런 고충쯤이야 견디고 이겨내야만 비로소 제 길을 걷는 십자가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꼭 이스라엘 여인들이 있게 마련이다. 계약 된 조건을 다 채워드렸을 뿐 아니라, 내 곡식을 거두어 주러 오신 분들에 대하여 섭섭하지 않게 성심성의껏 대해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서 막보기를 느껴야 할 때가 있다. 아! 이들이 떠나면서 나에게 막보기를 하고 갔구나! 내가 드린 정성과 성의가 어느 만큼인지를 내가 아는데 이들은 그것조차도 막보기를 하고 갔구나! 라고 느껴질 때 그 비통함은 인간이 인간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모멸감일 것이다. 어느 동물도, 어느 식물도, 인간처럼 모질지 않다. 농사를 지어보면 순리에 역행하지 않는 질서를 터득하게 된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함께 일하고 먹고 잠자는 사람끼리 이러고도 내일 나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까? 싶은 순간들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상당히 뻔뻔한 심장을 갖고 있다. 다시 내 얼굴을 보러 올 수도 있고, 보러 와야 한다. 와서 일도 하고, 먹고, 자고, 돈도 벌어가야 한다. 그리고 또 떠날 때는 그 떠난 자리에서 느껴야 하는!
 
그것도 여러 번 겪다가 보니 군중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함께 외쳤을 이스라엘 여인들의 이중성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식물이나 동물에게는 축적이라는 것이 없다. 가뭄 대비라든지 장마 대비라는 것도 없고, 과거나 미래도 없다. 오늘 하루를 해님 만났고, 물 마셨으면 내일은 내일에 달린 것이지 오늘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식물이나 동물에게는 문명이라는 것도 없다. 종족의 번식마저도 그 순간의 순리에 따라서 주어진 만큼만 행하고, 낳고, 기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축적이 있고, 대비가 있고, 문명이 있다. 그 세 가지 이유가 모진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치사하게 하고, 모질게 하고, 유치하게 하는지 모른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그 행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다. 그게 십자가 길에서 주님께 위로 받아야 할 인간성이다.
 
다른 작업장에서는 각자의 음식과 커피 등을 직접 싸서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그러나 나와 짝꿍은 모든 일체의 먹을거리와 마실 거리들을 제공하고 있다. 있는 동안에는 커피를 한 잔에 100개를 타서 마셔도 된다고 알려주고, 밥과 술을 100그릇과 100잔을 마셔도 된다고 할 만큼 충분히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돈 벌러 오셨으니 돈 벌어가서 가족과 먹고 쓰는 것이지 제 살림을 덜어가서 보태지는 마시라고 알려드린다. 그러나 인간의 습성은 가져가서 담아두고 싶고, 가져가서 다른 작업장에 갈 때를 대비하고 싶고, 강원도라는 고랭지 것이라는 의미가 있고, 그러다보면.......커피도 없어지고, 김치도 없어지고, 쌀도 없어지고.......심지어 밭에 심어 둔 풋고추며 땡초까지도 떠나고 난 날에는 휑하니 어린 것만 남는다. 한 개인에게 대놓고 말을 하면 상처 받으실까봐 단체로 앉아 있을 때 반복하여 돈 벌러 오셨으니 돈 벌어가서 가족과 먹고 쓰는 것이지 제 살림을 덜어가서 보태지는 마시라고 알려드린다. 그래도 모진 인간의 축적과 대비와 문명은 심성을 능가하여 지배하는 욕심이 된다.
 
그러고도 다음에 작업 때가 되면 벌이가 쏠쏠한 강원도로 불림을 받는다. 거절할 수도 없다. 미워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그 사람만 삯을 깎아서 줄 수도 없다. 세상은 아롱이다롱이가 함께 어우러져야 순환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비유처럼 포도원지기가 일꾼을 일찍 데려온 경우와 늦게 데려온 경우가 있었는데 그 삯이 일찍 온 이나 늦게 온 이나 같아서 불평을 하는 대목이 있다. 그 삯을 주는 권한은 주인에게 있다.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셔서 세상을 살아보았고, 그 끝 대목에서 공생활이라는 세상의 주인이 되어 살아보셨지를 않는가?! 주인은 작물 한 포기나 일꾼 한 사람을 보지 않는다. 주인은 작물 전체를 보고 작업 능률을 본다. 십자가 길에서의 주님은 그 이스라엘 여인들을 위로해야만 한다. 너희가 나를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외쳤음을 알지만 너희는 그 잘못 때문에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용기를 주신 것이다. 주인은 그 치사하고 유치한 욕심을 알고 있지만 열심히 일해 줄 것을 당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어야 주인이 될 수 있다. 군중 가운데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치고도 주님을 만나러 온 이스라엘 여인들의 뻔뻔한 심장을 주님께서 위로해 주지 않았다면, 농장의 주인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   한8,10~11 -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