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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 ....... 김상조 신부님
작성자김광자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21 조회수648 추천수6 반대(0) 신고


부처님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자기 어머니가 병에 걸렸는데

살아있는 사람의 눈을 먹어야 낫는다고 하니 부처님 눈을 하나 주십시오 하였다.

부처님은 주저하지 않고 자기 눈을 하나 빼내 청년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부처님의 눈을 받자 마자 땅에 동댕이치고는 발로 뭉개버렸다고 한다.

부처님 시종이 그 모습을 보고 화를 내가 부처님이 이렇게 말렸다고 한다.

“내가 한번 주었으면, 그 사람이 약에 쓰건 내던져 밟아버리건 상관없다.

보시는 주는 것으로써 끝나는 것이다. 가던 길이나 가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자 “공자”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참된 보시가 아니다. 가던 길을 되돌아가서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까지 해야 진정한 보시다.”

 

과연 무엇이 자비이고 사랑이고 용서일까?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자기 아들을 유괴해간 범인이 끝내 아들을 죽이고 유치장에 갇혔지만

신앙을 가지게 된 주인공은 자기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신앙고백을 하고

실제로 범인을 만나러 교도소에 간다.

아들을 죽인 범인을 앞에 두고 타오르는 분노로 손을 떨면서도 참으로 힘겹게 말한다.

“주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하기 위해 왔다.”

그러나 범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나는 이미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

이 말에 충격을 받고 주인공은 이렇게 외친다.

“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 이미 용서 받았대요. 하느님한테. 그래서 맘의 평화를 얻었대요.

이미 용서를 얻었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용서를 해요.”

 

어디까지 사랑을 베풀고 그것이 어떻게 돼야 참 사랑이 될 수 있을까?

각자의 사랑이 미치는 데까지 베풀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부처님처럼 “주었으면 그만!”

그가 그것으로 무얼 하든 마음의 평정심,

즉 평화를 잃지 않고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면 그것이 참 사랑, 참 보시가 아닐까 싶다.

물론 “공자”라는 별명을 가진 분의 말처럼,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지 또 제대로 사용하고 마음에 진정한 감사를 가지게 될지

먼저 알아보고 주는 것이 참으로 현명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쳤다면 참으로 허무하게 뭉개지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받는 사람의 욕구에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자선은 차라리 또 다른 폭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너는 가진 게 없고 받기만 해야 하니 주는 대로 받아!”

 

하지만 이런 물질적 자선이나 동정심은 사람에 따라 필요가 다를 수 있지만,

즉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지만, 자비는 그렇지 않다.

자비와 용서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고 무조건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흉악한 죄를 짓고서도 뉘우침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비나 용서라는 단어조차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니,

자비는 요구되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 내용이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큰 수치를 가리는 것밖에 없다.

즉 자비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주셨다.

아무 말도 없이 땅 바닥에 글씨만 쓰셨다고 한다.

이 모습은 이렇게 해석된다.

‘나는 저 여인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

만일 내가 저 여인의 얼굴을 똑 바로 쳐다본다면 그녀는 더 큰 수치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얼굴은 보는 사람마다 커다란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을 것이다.

‘맑다. 깨끗하다. 투명하다. 빠져들 것 같다.’ 등등

 

그러면서 사람들이 고발하는 죄목들을 땅 바닥에 쓰지 않으셨을까 싶다.

“죄, 간음, 돌로 침…”

그리고 당신이 가르쳐온 말씀,

“자비, 용서, 77번…”

 

계속해서 사람들이 아우성치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드셨다.

죄 없는 분이 죄 많은 여인과 그리고 똑 같이 죄 많은 고발자들을 향해 얼굴을 드셨다.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아무 죄 없는 분, 심판자이신 그분이 죄 많은 우리 인간들을 향해 당신 얼굴을 돌리신 것이다.

죄 많은 인간이 죄 없는 하느님을 뵐 때 처음에는 수치심이 불같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러면 참으로 무한한 그분의 자비를 입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편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돌려달라는 내용이 수도 없이 나온다.

 

“주님, 언제까지 마냥 저를 잊고 계시렵니까? 언제까지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시렵니까?”(시편13:2)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지 마시고 분노하며 당신 종을 물리치지 마소서.”(시편27:9)

“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가리시고 저의 모든 죄를 지워 주소서.” (51:11)

“주 만군의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80:20)

 

그렇게 예수님은 당신 얼굴을 죄 많은 여인과 또 군중을 향해 돌리신 다음 이렇게 외치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씀은 당신은 둘러 선 모든 사람의 죄를 꿰뚫어 보고 계시다는 증언이다.

그렇게 말씀하실 때 그분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 눈빛을 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나도 죄 많은 사람이지. 저 여자만 현장에서 들켰지.

우리도 얼마나 자주 마음으로 죄를 짓고 사는가!

나도 오늘 아침에 부모님을 원망했고 가슴에 못을 박았지 않은가!’

 

둘러 선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조금씩 자비심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향해 알 수 없는 호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저런 분이시라니! 자기를 옭아 메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너는 죄가 없느냐?” 하고 호통을 칠만도 한데 저렇게 침착하고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것과 똑 같이

둘러 서 있는 구경꾼들과 고발자 모두에게도 똑 같은 자비를 베푸셨다.

 

자비는 무조건 베푸는 것이다. 조건 없이 주어야 한다.

그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더 큰 자비심이 일어나고 멀리 멀리 퍼져나가는 것이다.

아무도 그 여인의 죄를 묻지 않고 떠나간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 모두에게 자비심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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