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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자렛 사람 예수" - 4.2,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4-02 조회수324 추천수3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4.2 주님 수난 성금요일

이사52,13-53,12 히브4,14-16;5,7-9 요한18,1-42

 

 

 

 

 

 

"나자렛 사람 예수"

 

 

 

오늘 성금요일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단 한 번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있어 영광의 부활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보루가, 마지막 피난처가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종신불퇴,

온 세상 뒤쪽에 더 이상 물러갈 곳 없다는 듯이

딱 버티고 있는 분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우리의 마지막 보루인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면 세상은 존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여 십자가의 길 기도 시 우리는 한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절망과 좌절의 순간,

즉시 눈을 들어 뒤를 보십시오.

바로 그 자리에 십자가의 예수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시련과 고통 중에 우리가 바라 볼,

유일한 힘의 원천인 분은,

단 한 분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에 유일한 참 사람이 있다면 나자렛 사람 예수 한 분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제 십자가를 지고

더 이상 물러 갈 곳 없다는 듯이 사는 것입니다.

 

이런 참 사람이자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살 힘이 생깁니다.

오늘 수난복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은

곧바로 우리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 연결됩니다.

온갖 시련으로 죽음과도 같은 절망의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그대로 그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십자가 없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그야말로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누구나 주어진 그만의 고유한 십자가입니다.

내려놓을 수도, 누구와 바꿀 수도,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비교할 수도 없는 내 운명과도 같은 십자가입니다.

 

이 운명과도 같은 내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십자가의 주님만을 따를 때 구원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 십자가를

끝까지 기쁘게, 용감하게 지고 갈 수 있을까요?

 

오늘 수난복음이 가르쳐 줍니다.

 

 

세상에 대한 이탈의 정신입니다.

세상에 살 되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래야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아 비로소 자유로운 삶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순례 여정 중의 우리 삶입니다.

늘 십자가의 주님께 눈길을 두는 것입니다.

주님 십자가의 죽음 넘어

주님 부활의 빛을, 기쁨을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이 초월적 기쁨과 빛이 이탈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수난 복음 중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바로 이 말씀이 예수님의 자유의 비결입니다.

유다인의 왕이라는 칭호 순전히 오해에서 기인했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이탈의 자유와 더불어

주님의 은총이 십자가의 짐을 가볍게 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 십자가의 삶은

이탈의 정신을 배워가는 인생학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서 순종을 배우셨고

저절로 이탈의 자유를 누리셨습니다.

하여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바로 이게 우리 삶의 목표요 의미입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

그대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왜 삽니까?

진리를 위해서, 진리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 때문에,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예수님, 진리 없으면 그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완전 허무요 공허입니다.

우리 영혼의 영혼과도 같은 하느님, 예수님, 진리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참 좋은, 무궁한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죽기까지 제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사는 것 자체보다

더 좋은 진리 증언의 삶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평생 삶 자체가

온통 하느님 사랑을, 하느님 영광을 환히 드러낸,

진리를 증언한 삶이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에서 수난 받는 종의 모습은

그대로 오늘 예수님의 수난모습입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홀몸인 우리가 아닙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다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서로 짐을 지고 사는 우리들이요,

우리 대신 누군가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며

우리 역시 누군가의 고통을 나누고 있을 것입니다.

내 죄의 짐이, 고통의 짐이 무거울 때

좌절하지 말고 즉시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에 합류시키십시오.

주님은 풍성한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이 또한 진리를 증언하는 삶입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두 임종어,

‘목마르다’와 ‘다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정의에, 진리에, 사랑에, 평화에,

바로 하느님에 늘 목말라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바로 이 목마름의 갈망이 열정의 샘입니다.

이 영혼의 목마름이 끊임없이 하느님을, 하느님의 뜻을 찾게 합니다.

이 목마름이 사라지면 영성생활은, 수도생활은 끝입니다.

마지막 까지 하느님을 목말라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늘 수난 복음에서 주님은

베드로가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버리자

그에게 이르십니다.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예수님의 결연한 자세가 감지됩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의 뜻을 목마르게 찾으며

순종의 삶을 사셨던 주님이셨습니다.

끊임없이 아버지의 뜻을 찾고 순종해도 목말랐던 삶이었지만,

예수님은 마지막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으로

장엄한 마침표를 찍습니다.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인생을 마치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 지요.

아마 이런 ‘다 이루어졌다.’ 라는 임종어로

삶의 마침표를 찍고 돌아가신 분은

인류 역사상 예수님 한 분 뿐일 것입니다.

하여 필립비 교회 신자들의 감격에 벅찬 찬가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도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도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를 들어 높이시고

  어느 이름보다도 뛰어난 이름을 그분에게 내리셨도다.”

 

 

예수님의 두 임종어,

‘목마르다’와 ‘다 이루어졌다’라는 말씀 평생화두로 삼고 싶습니다.

 

‘목마름’과 ‘아버지의 뜻을 이룸’은 우리 영성생활의 리듬입니다.

하느님을 목말라 끊임없이 하느님을,

하느님의 뜻을 찾아 십자가의 순종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저절로 이탈의 자유로운 삶이요

그대로 진리를 증언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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