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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분한(?) 마음으로 기도를...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4-12 조회수578 추천수0 반대(0) 신고
                    분한(?) 마음으로 기도를...




충남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와 태안군 태안읍 도내리 사이 길처에는 긴 저수지가 하나 있지요. 그 저수지를 끼고 아스라이 뻗은 곧은길 옆으로는 전신주들이 가물가물 이어져 있어 자못 그림 같은 느낌을 주지요.

도내리 쪽 저수지 끝 큰길 너머에는 바다를 막은 제방이 있고 제방 아래 갯벌과 또 소리소문 없이 들고나는 바닷물은 평화로움 자체랍니다. 작은 조각배들과 동그란 섬들이 있고, 가끔은 큰고니 가족도 볼 수 있는 그곳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해서 종종 그곳에 가서 오후 걷기 운동을 하곤 하지요.        
 

▲ 어송저수지 길 /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길이다. 좌우에 저수지와 전신주 행렬, 푸른 들과 야산을 거느리고 있는 길이다. 2Km 정도 밖에 안 되는 길인데도 아스라한 느낌을 준다.  
ⓒ 지요하 / 좋아하는 길

한번은 제방 한 쪽에 차를 놓고 걷기 운동을 시작할 때 일부러 소풍을 온 건지 잠시 쉬어 가는 건지 모를 단란한 한 가족을 보게 되었습니다. 젊은 부부와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일 것 같은 4인 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제방 턱 위에 과자 봉지들과 음료수와 캔 맥주를 놓고 오붓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 젊은 친구가 날 닮아서 딸 다음에 아들을 두었군.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좋은 때다. 저렇게 어린아이들을 키우며 살 때가 제일 행복하지 뭐"

나는 혼자 속말을 굴리며 그 가족 옆을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아이들 뺨이라도 어루만져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경치를 감상하며 캔 맥주를 즐기는 그들 부부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묵주기도에 열중하며 얼마간 걷던 나는 일순 '혹시?'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몸을 돌리고 저만치 멀어진 그들 가족을 보니 제방 턱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나는 또 한번 '혹시?' 하는 생각에 그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습니다. 하지만 내가 중간쯤 갔을 때 그들 가족은 승용차에 올라 출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 도내리 바다 / 충남 태안군/읍 도내리(안 도내) 바다는 호수 같은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다. 동그란 섬 근처 갯물에서 노닐고 있는 고니 가족도 종종 볼 수 있다.  
ⓒ 지요하  / 호수 같은 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과자봉지며 음료수병이며 맥주깡통들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나는 허탈하면서도 분한 마음으로 주먹을 쥐었습니다. 그 젊은 부부를 붙잡지 못한 것이, 그들 승용차에 그 쓰레기들을 실어보내지 못한 것이 너무도 억울했습니다.

나는 분한 마음을 안은 채 멀어지는 승용차의 얄미운 꽁무니를 보며 묵주 쥔 손으로 성호를 그었습니다. 분한 마음으로 성호를 긋기는 오랜만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기도의 지향은 매우 명료한 듯싶더군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천주교 대전교구 <대전주보> 11일치 '지요하와 함께 보는 믿음살이 풍경' 난에 게재된 글입니다.  


2010.04.12 17:04 ⓒ 2010 OhmyNews




지요하와
함께 보는
믿음살이 풍경 (16)



                                   분한 마음으로 성호를




충남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와 태안군 태안읍 도내리 사이 길처에는 긴 저수지가 하나 있지요. 그 저수지를 끼고 아스라이 뻗은 곧은길 옆으로는 전신주들이 가물가물 이어져 있어 자못 그림 같은 느낌을 주지요. 도내리 쪽 저수지 끝 큰길 너머에는 바다를 막은 제방이 있고 제방 아래 갯벌과 또 소리소문 없이 들고나는 바닷물은 평화로움 자체랍니다. 작은 조각배들과 동그란 섬들이 있고, 가끔은 큰고니 가족도 볼 수 있는 그곳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해서 종종 그곳에 가서 오후 걷기 운동을 하곤 하지요.        
한번은 제방 한 쪽에 차를 놓고 걷기 운동을 시작할 때 일부러 소풍을 온 건지 잠시 쉬어 가는 건지 모를 단란한 한 가족을 보게 되었습니다. 젊은 부부와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일 것 같은 4인 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제방 턱 위에 과자 봉지들과 음료수와 캔 맥주를 놓고 오붓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 젊은 친구가 날 닮아서 딸 다음에 아들을 두었군.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좋은 때다. 저렇게 어린아이들을 키우며 살 때가 제일 행복하지 뭐" 나는 혼자 속말을 굴리며 그 가족 옆을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아이들 뺨이라도 어루만져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경치를 감상하며 캔 맥주를 즐기는 그들 부부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묵주기도에 열중하며 얼마간 걷던 나는 일순 '혹시?'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몸을 돌리고 저만치 멀어진 그들 가족을 보니 제방 턱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나는 또 한번 '혹시?' 하는 생각에 그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습니다. 하지만 내가 중간쯤 갔을 때 그들 가족은 승용차에 올라 출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과자봉지며 음료수병이며 맥주깡통들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나는 허탈하면서도 분한 마음으로 주먹을 쥐었습니다. 그 젊은 부부를 붙잡지 못한 것이, 그들 승용차에 그 쓰레기들을 실어보내지 못한 것이 너무도 억울했습니다. 나는 분한 마음을 안은 채 멀어지는 승용차의 얄미운 꽁무니를 보며 묵주 쥔 손으로 성호를 그었습니다. 분한 마음으로 성호를 긋기는 처음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기도의 지향은 매우 명료한 듯싶더군요.

                                                                      지요하(소설가·태안성당)


*2010년 4월 11일(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주일) <대전주보> 제2025호 |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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