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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봉헌과 성체와 삼위일체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4-23 조회수738 추천수13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활 3주간 금요일 - 봉헌과 성체와 삼위일체

 

 

하느님은 은총을 인간에게 주시기 위해 그 인간이 은총을 받기에 합당한지 시험해 보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그의 후손들에게 축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런 축복을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후손을 일으킬 아들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이 반드시 실현된다는 사실을 증명이나 하듯이 늦은 나이에도 아들을 주십니다. 그의 이름이 이사악이고 이사악을 통해 많은 축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조금 자란 이사악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그를 끌고 산으로 올라가 아들이 멋도 모르고 지고 온 장작 위에 그를 묶어놓고 칼로 찌르려합니다.

이 믿음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하늘이었습니다. 하늘의 천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이사악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면서 다시 이사악을 통해 세워질 하느님의 백성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풀겠다는 약속을 재확인하십니다.

 

하느님은 왜 축복을 그냥 주시지 않고 인간에게 축복을 받을만한지를 시험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느님은 은총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부스러기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두 모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시며 귀한 은총이 부당한 사람에게 낭비되어져서는 안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의 상태에서 성체를 영하는 것이 매우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은 상태로 성체를 영하면 하느님을 돼지우리에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체성사의 의미와 삼위일체를 연결시키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아들은 이름 외에 아무 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아버지께 순종하십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아들을 보시며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일까요? 아버지께서 당신께 죽기까지 순종하시도록 자신을 낮추시는 것을 보고 그를 사랑하여 주시는 모든 것은 바로 사랑, 즉 ‘성령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하시는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기셨다.” (요한 3, 34-35)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성령님을 통해 주시는 그 사랑은 당신의 모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되돌려 주실 때 아들은 죽음에서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이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세례를 통해 받으셨던 성령님을 아들은 죽기까지 순종하며 아버지께 돌려드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다시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를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이 주고 받음과 가난하게 됨과 부자가 됨은 삼위일체 안에서 쉼 없이 반복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버지의 힘으로 사시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아들은 우리와 똑 같이 반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멜키세덱에게 바친 것처럼 벌어들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주님께 바칩니다. 사제는 그 제물을 마치 오천 명을 먹이실 기적 때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빵과 포도주의 모양으로 아버지께 바칩니다.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인 아들을 그 빵과 포도주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되돌려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곧 생명나무, 즉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이것보다 큰 은총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만큼 작은 은총을 주십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믿음은 봉헌을 통해 증거됩니다.

실제로 봉헌된 삶을 산다고 하면서도 매 순간 그분의 뜻을 찾아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겉으로만 봉헌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아들이 아버지께 그것을 다시 되돌려주시듯이 우리도 받는다면 드려야합니다. 그 드림을 통해 더 큰 은총을 받게 됩니다.

 

<<짧은 묵상>>

누군가를 ‘위해서’ 살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만큼 비참한 삶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참 행복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살 때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하셨듯이, 자신만을 위하며 산다면 늘 우울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늘 행복합니다. 사랑하면 자신을 잊고 상대를 ‘위해’ 살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죽는다.’라고 하십니다. 누구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 바로 삶의 의미가 됩니다. 나만을 ‘위해서’ 산다면 반대로 삶의 의미가 없어져서 자살을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인간을 ‘위한’ 삶이 아니었다면 숨 쉬는 것조차 힘드셨을 테지만 당신은 사랑을 ‘위하여’ 무거운 고통을 즐겨 받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말은, 사랑 받는 것보다 사랑 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연예인처럼 아무리 많은 사랑을 받아도 삶의 의미가 없어져 자살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온전히 사랑하여 그 사람을 위해 살려고 한다면 절대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위하여 살게 되고 그 사람 때문에 나의 삶이 의미 있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더 정확히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가치 있어 질 것입니다. 우리는 숨 쉬는 것 하나까지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체’입니다. 그것만으로 그 분을 위해 온 생을 바쳐도 우리 삶의 의미는 충분합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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