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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0-04-23 조회수814 추천수12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0년 4월 23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Whoever eats my Flesh and drinks my Blood
has eternal life,
and I will raise him on the last day.
(Jn.6.54)
 
 
제1독서 사도행전 9,1-20
복음 요한 6,52-59
 
지금은 키우지 않지만, 예전에 저는 강아지를 오랫동안 키웠습니다. 혼자 사는 저로써는 강아지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고, 특히 주인인 저를 잘 따를 때에는 마치 제 자식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이 강아지를 보면서, ‘나보다 더 낫다.’ 라는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성지에 있을 때였습니다. 거의 모든 강아지들이 그렇겠지만, 제가 키우던 강아지는 특히 식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보면 참지 못하고 정신없이 달려드는 것입니다. 저는 참아내는 훈련을 시켰지요. 즉, 먹을 것을 보고도 어느 정도 참아야 간식을 주는 식의 훈련을 했습니다.

계속된 반복 훈련으로 인해서 먹을 것을 보고도 꾹 참습니다. 그러면서 저만 계속 바라보는 것이에요. 제 손이 컵으로 가면 강아지의 눈은 컵으로 옮겨가고, 제 손이 접시로 가면 눈이 접시로 옮겨갑니다. 또 내가 무엇인가를 먹으면 강아지의 눈도 제 입으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행동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바라보는 강아지를 보자 그 모습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문득 ‘나는 주님을 얼마나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렵고 힘들 때에만 주님을 찾을 때가 많았고,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이 세상일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살았을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특히 이번 주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듯이,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신데 우리는 과연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향해서 시선을 맞추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이야말로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받아들이는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강아지가 나만을 바라보고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을 때 감동을 받는다면, 주님께서는 과연 어떠하실까요? 어쩌면 내가 강아지를 통해서 얻는 감동보다도 더 크게 주님께서는 감동을 받으시고, 더 큰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사울은 주님을 보려고 하지 않았고 주님의 뜻에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았기에, 초대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울의 눈을 가려서 앞을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즉, 마음의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현실 안에서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그 순간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주님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주면 돈은 잃어도 친구는 유지한다. 빌려주면 돈은 되돌려 받는다 해도 친구를 잃을 수도 있다(벌워리턴).





간지럼 태우기(김애옥, ‘행복한 동행’ 중에서)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을 보았다. ‘뽀뚜루’라는 입술 막대장식을 한 조에족의 삶은 우리와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자연에서 먹을 것을 구하되, 애완동물로 키운 동물은 절대 먹지 않는다. 꼭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사냥하고, 사냥을 잘하면 배우자도 여러 명 거느릴 수 있을뿐더러 여자 역시 두 남편과 같이 살아가는데 어색함이나 불안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종족인 와우리족은 인간과 밀림동물들 간의 묘한 먹이사슬 관계를 보여 주기도 하고, 함께 사랑을 나누어 주지 않고 사냥만하는 남성들을 혼뜨검 내는 여자들의 반란은 현대 여성의 남성상 인식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자바리 밸리의 한 종족은 게으른 어린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는 회초리질을 하는 축제가 열린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아이들이 밀림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최소한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처럼 다큐멘터리의 인상적인 장면을 통해 소박한 교훈을 많이 얻었다.

특히 조에족은 사냥 후 사냥감을 부족들과 같이 나누는데, 이때 일부에서 불만을 표하는 사람이 생겨난다. 그러면 불만해소의 방법으로 ‘간지럼 태우기’를 사용한다. 불만에 찬 이들이 누워 있는 해먹으로 가서 웃을 때까지 간지럼을 태우고, 웃음으로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해소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불만도 이렇게 단순하게 풀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들은 온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결혼 방식도 일반화된 방식과 많이 다르다. 하지만, 남자와 네 번을 자게 되면 결혼을 해야 된다는 점도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 자연과 더불어 가장 단순한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이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조상들의 지혜를 존중하고, 욕심 부리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사냥해 그것을 같이 나누며 살 줄 아는 이들을 보며 새삼 행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문명과 야만의 척도가 행복에만 있다면 과연 현재 우리의 세계가 충분히 문명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다큐의 메시지는 진정한 내려놓음의 미학이 아닐까 한다.
 
 
 
 
My one and only love - Isao Sas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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