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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부활 제5주일 2010년 5월 2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4-30 조회수426 추천수17 반대(0) 신고

부활 제5주일      2010년 5월 2일  


요한 13, 31-35.


요한복음서가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이미 기록된 다른 복음서들 안에 있는 주제들을 정리하여 명상하는 식으로 엮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를 명상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들은 예수님의 최후만찬에서 비롯된 성찬을 이미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최후만찬 이야기를 새삼 하지 않고, 신앙공동체들이 거행하고 있는 성찬이 지닌 의미를 명상합니다. 그것이 최후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발을 씻는 것은 종의 몫입니다. 이 복음서는 종이 하는 일을 몸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성찬에 참여하는 신앙인도 종과 같이 섬김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제자들의 발을 씻은 후,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가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었다고 말할 때는 그분이 하신 일이 하느님을 보여주었다는 뜻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그분이 영광스럽게 되신 대표적 사건으로 말합니다. 죽음은 그분이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결과였고, 하느님이 내어주고 쏟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셨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예수님을 보면서 하느님이 어떤 섬김이신 지를 알아들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당국이 하느님을 생각하던 것과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높고 훌륭한 것을 좋아하는 인간 세상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느님도 높으시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주신 법은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하고, 제물 봉헌도 당연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하느님을 이 세상의 권력자에 준해서 상상하고, 그분으로부터 최대의 혜택을 받아내겠다는 인간의 마음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그렇게 가르쳤고, 그런 가르침에 오염된 마음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단정하여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탐합니다. 종교 집단도 사람들의 모임이라 그 안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구실만 있으면, 동료 인간 위에 군림하고 횡포(橫暴)합니다. 종교 집단의 기득권자들은 하느님을 후광으로 삼아 자기의 횡포를 정당화합니다. 흔히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 말하면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합니다. 재물과 권력이 보이는 곳에 인간은 늘 횡재(橫財)와 횡포의 유혹을 받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의 실세인 율사와 사제들도 걸핏하면,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하며 횡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횡포를 비판하셨습니다. “알다시피 민족들을 다스린다는 자들은 그들 위에 왕 노릇하고 높은 사람들은 그들을 내려 누릅니다. 그러나 그대들 사이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르 10,42-43).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발생하는 사랑과 헌신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모태인 이스라엘의 신앙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모세의 깨달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이며,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인간의 실천들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출애 33,18-20 참조). 창세기 3장은 인류가 발생하면서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안에 선과 악의 기준을 두면서 인류역사 안에 죄가 시작하였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면, 이웃에게 자기의 뜻을 강요하게 되고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있는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도, 횡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병자를 만나면 그를 고쳐 주고, 나병환자를 만나면 그를 깨끗하게 해주셨습니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을 만나면 용서를 선포하여 죄책감에서 그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과시하지 않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도록 실천하셨습니다. 후에 베드로 사도는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행하셨습니다.”(10,38).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분이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내가 과연 그리스도 신앙인의 실천을 하며 사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아낼 것을 원하고, 사람들이 나를 높이 평가하고 대우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 예수님이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이웃에게 흐르도록 자기 스스로 묵묵히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그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사람을 사랑하고 섬깁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몸 안에 나타나고 또 인류역사 안에 살아 흐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과 교섭하여 혜택을 얻어내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아내기 위한 수작도 아닙니다. 기도, 미사, 헌금 등은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을 위한 절차입니다. 우리는 기도에서 내가 섬겨야 하는 이웃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그 사람 안에 흘러들 것을 빕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우리도 같은 실천을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헌금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재물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되새깁니다. 이렇게 기도도, 미사도, 헌금도 모두 사랑하고 섬기시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합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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