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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57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01 조회수407 추천수6 반대(0) 신고
 

 

 ♣ 성경으로 공부하는 가톨릭 교리 ♣

 

II. 삼위일체

 

5.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

p. “저승에 가시어”: 강생의 완성

성경에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사도 3,15; 로마 8,11; 1코린 15,20)라는 표현들이 자주 나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다는 의미는 그 내면에 죽은 자들 가운데 가 있으셨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동시에, 부활하시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요한 20,17) 아버지께 돌아가야 한다고 하시는 것은 분명 부활 이전까지는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고 죽은 자들 가운데 계셨다는 것을 보증해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에까지 내려가 계셨다는 의미를 베드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1베드 4,6)

“예수께서는 지옥에 떨어진 이들을 구하거나, 저주받은 지옥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보다 먼저 간 의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 곳에 내려가신 것이다.” (625년의 제 4차 톨레도 공의회: DS 485; 마태 27,52-53 참조)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내려가시기 전까지는 그 곳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함께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선한 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었다면 모든 이들은 지옥에 있어야 할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희생으로 지옥에 있던 의인들이 구원되었습니다. 이 의미는 그 분의 희생으로 심판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즉, 그 분께서 데려오시지 않고 남겨진 이들은 이제 영원히 지옥에 남겨지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빛처럼 빛을 좋아하는 오징어와 빛을 싫어하는 다른 물고기들로 나뉘게 한 심판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지옥까지 내려가지 않으셨다면 그 분의 강생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분은 온 세상, 즉 지옥까지도 포함하는 가장 낮은 곳까지 이르렀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구원이 되고 복음 선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옥조차도 하느님의 권능 밖에 있지 않습니다. 가장 밑바닥을 치지 않고서는 위로 올라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물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장 밑바닥을 쳐야 그 부력으로 가장 높이까지 치솟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까지 오르기 위해 지옥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신비이고 우리는 이 신비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심은 아버지와의 완전한 일치를 가져오고 이 완전한 일치에서 ‘마리아’가 탄생합니다. 성자 앞에서의 마리아의 고통은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교회를 탄생하게 합니다. 그래서 요한이 교회의 상징으로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옥으로 내려감은 가장 낮아지는 고통이고 버림받음입니다. 이 버림받음 안에서의 순종은 사랑의 일치와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q. 빈 무덤 - 마리아야! 스승님!

 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로라면 첫 번째 예수님의 발현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보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 막달라 마리아는 계속 남아 울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체취가 묻어있는 무덤을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빈 무덤은 부활의 증거는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이어주는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빈 무덤에서 당장 주님을 만날 수는 없을지라도 결국 그 분을 만나게 될 곳은 그 곳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시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라고 부르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의 어머니까지도 ‘여인’이라고 부르십니다. 여기서 마리아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신랑’으로서 ‘신부’를 부르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고 합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요한 10, 3)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안다는 것은 완전하게 안다는 뜻이고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완전하게 사랑한다는 뜻이고 완전한 사랑은 바로 신랑으로서 신부를 사랑하는 것이 그 절정입니다.

교회란 단어 ‘Ecclesia’는 희랍어, kaleo(부르다), 즉 ‘이름’으로 ‘불림을 받은 이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것입니다.

요한은 고의적으로 에덴동산과 아가서에 나오는 ‘동산’이란 단어를 씀으로써 우리의 신랑이요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이며 하와를 하늘나라에서 만나는 것으로 형상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교회의 상징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이름 대신 ‘랍뿌니’, 즉 ‘스승님’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이름을 정확하게 아시지만 인간은 이 지상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끊임없이 그 분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 할 뿐입니다. 즉, 우리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랍뿌니’인 것입니다. 그분을 알아가는 노력이 바로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이들의 모범입니다. 알려고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애인 사이에 “우리가 안 지 얼마나 됐지?”하는 말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된지 얼마나 됐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게 ‘안다’는 의미는 ‘사랑한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알기 시작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가 아닌 사랑하기 시작한 때부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다는 뜻은 참으로 사랑한다는 뜻이기에 예수님을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려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삼고 그 분께 배우려고 하는 이는 그 분을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뜻입니다.

빈 무덤은 성경입니다. 그러나 성경만 보고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빈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성경을 떠나지 않고 말씀 안에 오래 머무르는 사람은 성경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교회이자 그리스도의 배필이신 성모님 또한 그리스도로부터 교육을 받으셨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은 마음속에 간직했다.” (루카 2, 50-51)

3일 동안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잃었던 기억은 나중에 성모님께서 잃으신 그리스도를 3일 동안 기다리셔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셨음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기적 이야기처럼 예수님은 3일 만에 부활하셔야 함을 예고하셨습니다. 이런 가르침이 없었다면 성모님의 기다림은 3일이 아니라 30년처럼 길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이 어머니로서 그리스도께 인성을 주셨더라도 그 분이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그로부터 배웠습니다. 배운다는 것이 곧 사랑한다는 것임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기억’했다는 의미는 ‘배운다’는 의미가 ‘매 순간 그리스도의 삶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삶을 기준으로 나의 삶을 바꾸어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가 담긴 성작을 손에 들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 분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고 그 분과 하나 되는 길입니다.

 

 

 
 
 
<제목 : Beauty of Forgiveness>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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