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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다 ....... 김상조 신부님
작성자김광자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05 조회수523 추천수2 반대(0) 신고

 
 
 
 
시골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2학년 반 배정을 받고
새 교실에서 새 선생님과 인사하는 날 아침,
아버지께서 나를 번쩍 안아들고 대구로 이사 간다며 삼륜트럭에 태우셨다.
그때부터 도시생활이 시작되었다.
시골생활은 참으로 좋은 기억만 가득하다.
아직 어렸기 때문에 주위 어른들의 사랑과 귀여움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난다.
어리다고 어리광을 부려도 되고
어른들 자리에 끼어도 되고
어른들 반찬을 먹어도 되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도시 생활은 가난했다.
어느날 찬장 그릇을 찾다가 간장 종지(작은 그릇)에 동전 소리가 쨍그랑 들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1원짜리 동전 하나도 구경하기 힘든 시절에!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를 들고 나가서 오후 내내 군것질 하며 다니다가
집에 들어가 어떤 그럴듯한 핑계를 댈 수 있을까 고민 고민하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집 근처에서 한 참을 망설이다가 집 가까이 가니 야단이 났다!
형이 아버지께 몽둥이 찜질을 받아서 각목이 두 개나 부러졌다고 한다.
형이 뭔가 아버지께 크게 잘못한 모양인데 동전 없어진 것이 보태져서 아버지 화가 폭발했던 모양이었다. 각목이 두 개나 부러진 현실 앞에서 감히 내가 그랬다는 고백을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
결국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또 동전에 손을 뻗쳤다.
그 날은 더 늦은 시간에 고개를 푹 떨구고 집에 들어갔고 결국 어머니 빗자루 몽둥이 찜질을 받았다.
몇 번이나 계속되었다.
어느 날 늘 새벽일찍 일자리에 나가시던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학교에 데려다 주시겠다고 나서신다.
올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햇빛이 눈부시던 아침 등굣길에서 아버지는 뜻밖의 행동을 하셨다.
오원짜리 동전 하나를 손에 쥐어주시며
“다시는 네 엄마 동전 뒤지지 말고 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하거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주변이 환하게 빛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용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느님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나의 나쁜 행실?^^은 사라졌다.
 
몇 개월전 그 기억이 나서 어머니께 물었더니
“그 때 내가 많이 때맀재? ...” 하시더니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리시며 우신다.
깜짝 놀라서 왜 우시냐고 물으니,
“마이 아팠을낀데 내가 너무 아프게 때린 거 같다. 너무 아프게, 마니 때렸어…” 하신다.
 
가슴이 짠 해졌다.
“아입니다! 그래야 하지예! 그래야 교육이 되니 당연히 그랬어야지예!
아이고 어무이도 참 내! 울지 마이소!”
그게 부모님 마음인가 싶었다.
 
예수님은 다 아신다. 모든 것을 다 아신다.
무엇보다 우리가 잘못할 것을 아신다.
그렇기에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내다보시기에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신다.
과음, 과식, 폭식하거나 과욕 부리지 말 것을 알려주시고
앙심을 품거나 이기심을 부리지 말 것을 알려주신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를 이해한다. 네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안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라. 다시 해 보아라. 일어나거라. 또 시작해보자!”
 
우리가 이런 예수님, 하느님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알게 해주는 분이 계시단 사실 조차도 모르고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르거나
자기 연민에 빠져서 더 큰 잘못을 지을 수 있지만
우리에겐 이 모든 것을 자상하게 알려주시고 고쳐주시는 하느님이 계시니 말이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도 이런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위로와 희망이며 사랑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은(와서 말씀을 선포하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요한12:47).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은 여기에 맞추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는 새 계명을 주신 것만 읽었지만 복음서 원문에는 이 말씀도 들어 있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 다음 구절에는 예수님께 목숨까지도 내 놓겠다는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시면서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배반할 것을 예고하신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핵심 내용, “서로 사랑하여라” 하는 새 계명을 주신다.
그러면서 그 이유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미 말했지만,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완고함과 부족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 분이시다.
그런 그분이 사랑의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너무나 서로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란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즉, 우리가 너무나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게다가 함부로 하느님의 영역까지 넘보는 존재,
그래서 선악과마저 따 먹는 참으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존재인 것을 상기 하면서
이 계명을 알아들어야 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에 너무나 무디고,
더욱이 베드로는 당신을 배신하고 세 번이나 모른다고 거짓말 할 것을 아셨기에
그것을 미리 예고해 주심으로써 우리게 대한 애틋한 당신 사랑을 보여주신다.
그래야 우리가 복음을 읽을 때마다 그것을 기억해내고
우리게 그 말씀을 해주신 당신의 깊은 연민의 정을 깨닫게 될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이다.
 
이런 그분의 배려가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 깊이 베어 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다른 제자들에게는 이런 말씀도 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능력이 있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보여주신 모범(세족례 등)과 실천(십자가 제사)에 따라
그것에 용기를 얻고 힘을 얻어 살아가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저래서 저 사람들이 크리스찬이구나!” 하고 말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신 것이다.
 
수없이 많은 순교성인과 다른 성인 성녀들의 삶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도,
그 성인 개인, 그 사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능력과 영광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하고 놀라면서
사람에게 그런 놀라운 순교열정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된다.
 
애초에 우리에겐 한 터럭 만큼도 생명을 창조할 능력이 없었고,
풀 한포기 하나도 자라게 할 능력이 없었다.
단지 하느님께서 “있으라!” 해서, 그 말씀 때문에 빛이 생겨나고
사람이 생겨나고 풀과 나무와 온갖 생물들이 있게 되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능력 때문에
오늘 하루도 건강하고 활기차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때문에 참으로 중요한 것, 참으로 감사한 것은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이 예수님을 통해 언제나 그렇게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여라” 하는 그분의 계명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의무이기 이전에,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사랑할 능력을 주겠다는 약속이면서,
그러니 우리는 충분히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격려의 말씀인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우리의 나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고 그 모든 나약함을 당신의 공로로 온전히 채워주기 위해서
하느님이신 그분이 우리와 똑 같은 사람으로 나시고 살으시고 수난받고 우리의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하신 말씀도,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으니 우리도 그 보답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조건적 명령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조건이 채워졌을 때만 사랑하는 분이 아니라,
심지어는 아무런 조건이 채워지지 않고 배신할 때 조차도 사랑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그분처럼 우리도 사랑할 수 있다고, 그런 힘을 주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으로 알아 들을 수 있다.
 
하느님, 예수님은 너무 너무 사랑이 많으셔서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 상태가 어떻든지 간에 상관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말을 한다면
하느님을 너무나 가소롭게 여기는 것이다.
하느님이 그렇게 인간들의 얄팍한 속임수에 넘어가실 분도 아니실뿐더러,
우리가 아무리 죄가 많아도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그분을 속이고 능멸한 죄까지도 없었던 것으로 하실 수는 없는 분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서울을 가야 하는데 부산으로 거꾸로 내려간 것의 책임은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갔던 만큼 되돌아가야 하고 서울로 방향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제 스스로 서울쪽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는 한,
아무리 하느님이 서울로 방향을 바꿔놓아도
제 스스로 다시금 부산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은 하느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오늘 1독서에서 바울로가 선교을 다니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라고 말한 것도
이런 그분의 사랑의 능력을 알았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 스스로 환난을 겪어낼 힘이 있어서 그 덕분에 순교까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그런 능력을 주시기에 그럴 수 있으니 그렇게 용기를 내라는 말인 것이다.
 
어제, 대구 관덕정 성지에 가서 그곳에서 참수 당하신 많은 순교자들의 어록을 보면서
그런 깨달음이 더 분명해졌다.
언문(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분들이 한자로 된 교리서를 통해 믿음을 가진 것보다는,
자신에게 그런 믿음의 깊이를 가르쳐주는 여러 신자 교우들의 믿음과 실천을 보면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강한 성령의 힘을 받았기 때문에
감히 “여러분이 육신의 부모와 임금을 배신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지어내신 천주를 배신할 수 없으니 죽여주시오”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엄청난 성령의 활동이 아닐 수 없다.
 
환난을 겪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에서 주어지는 갖가지 시련과 고통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도 깨달을 수 있다.
 
정의가 짓밟히고, 약한 이들이 무시당하고, 심각한 환경파괴의 현실이 참으로 걱정스럽고 고통스러운가? 그렇다면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은총의 순간인지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수고와 수난에 동참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은총,
곧 그분 자신의 수난과 고통을 내가 겪는 은총이 된다는 사실이다. 키레나 사람 시몬처럼…
 
우리 자신의 나약함, 완고함, 무지함은 한편 죄가 되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가지시는 연민의 정,
그 사랑의 힘을 입으면 참으로 복된 은총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분은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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