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사진묵상 - 십자고상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05 조회수1,039 추천수2 반대(0) 신고
사진묵상 - 십자고상
                                   이순의
 
 
 
 
집안 정리를 하면서 책꽃이를 옮기는 순간
안방의 십자고상에 슬쩍 스치는 것 같았다.
놀라서 십자고상을 내려 보았더니 그만!
예수님의 종아리가 골절이 되고야 말았다.
일을 하던터라서 그냥 걸어두려 했더니 짝꿍이 야단을 쳤다.
<거실 십자고상에 이름표가 없어진지가 언제인데
그 이름표 떼다가 거실 십자고상에 붙이고
다리부러진 십자고상은 산에 갈 때 모시고 가서 태워드려.>
그랬다. 이름표만 떼다가 거실 십자고상에 붙이고 안방에 걸었다. 
그리고 거실 십자고상은 새로 사기로 하였다.
 
 
 
 
 
성당의 성물방에 발을 들여 놓았다.
가장 중앙에
가장 크게
가장 희게
눈에 확 들어왔다.
그리고 신부님께서 출타 중이셔서 축성을 받지 못하고
품에 꼭 안고 집으로 와 거실 벽에 걸었다.
그런데 좋아할 줄 알았던 짝꿍이 축성을 받았느냐고 물어온다.
아니라면 빨리 가져다 주고 바꿔오라는 것이었다.
놀라서 물었더니 예수님의 고개가 왼쪽으로 기울었으니
안된다는 것이었다.
특별한 관심없이 선택한 나의 무심함과 짝꿍의 눈은 달랐다.
성당에 다니면서 그냥 발품만 파는 줄 알았는데
진심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짝꿍의 야단스런 꾸중이 민망하여 급하게 성물방에 돌려 주고
새로 바꾸어 마련하였다.
우선 짝꿍이 좋아라 했고, 손수 걸어 주었다.
<나는 잘 몰라도 예수님 고개가 착한 강도한테 기울어져 있다는 정도는 아네.>
그리고 십자고상의 반품에 대하여 잊고 있었다.
성당에 다닌 세월이 있었으므로
짝궁의 식견에 만족스럽기도 하였다.
 
 
 
 
 
 
 
 
 
 
 
 
 
 
 
 
 
그런데 오늘 미사 후에.
우연히 말을 걸어 오시는 자매님이 계셨다.
<저번에 십자고상을 바꾸셨지요?
예수님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향한 십자가는 부활을 상징하구요.
왼쪽으로 돌린 십자가는 수난을 상징한다네요.>
순간이지만 참 깊이 생각하여야 하는 말씀이었다.
짝꿍한테 야단을 맞고 십자가를 바꾸려 했을 때
그 이유를 예수님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려져서라고 말씀드렸었다.
그런데 성물방의 봉사자들께서도
그런 나의 대답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 하였던가 보다. 
그래서 잠깐이지만 신중하게 답을 해 드리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의 표징과 관련하여
한 번쯤 짚어볼 필요도 있을 것 같았다.
특히
오래동안 가톨릭 교회를 다닌 교우들 보다는,
가톨릭 교회의 준성사적 의미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 있는 분들 보다는,
새로 십자고상를 마련 하신다든지
교회가 마련한 의미들에 대하여 알고자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고자 한다.
 
 
 
 
 
 
 
 
 
 
 
.
가톨릭 교리서의 간단한 해석에서 보면
<십자가는 일반적으로 구원과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상징이다. 가톨릭의 십자가는 보통의 십자가와는 달리 십자가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달려 계시며 몸에 오상이 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십자고상이라고 일컫는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 십자고상을 눈앞에서 잘 띄는 장소에 둔다. 그리고 처다볼 때마다 그리스도의 강생구속과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고 그 앞에서 기도 한다. 그런데 십자 고상에는 I.N.R.I - J.N.R.I 라는 글자를 윗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뜻이다 (Jesus Nazarenus Rex Judaeorum).> -가톨릭 교리용어 해설집 참고, 최형락신부지음 -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발전은 교회 안에서도 그만큼의 다양성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스도교라는 문화적 발전은 그림,조각, 성가, 복음성가, 건축, 출판, 부흥회, 피정, 등등 모든 면에서 현대가 요구하는 다양성을 수용하며 발전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많은 예술가와 문화인들의 열정은 전통과 충돌하기도 하고, 절제하거나 수용하기도 하며 이 시대적 그리스도교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인 교우들은 그 깊이를 다 이해하기 전에 그 충돌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바로 이번 십자고상을 마련하는 과정과 같은 사소한 경우일 것이다.
 
잘 알지 못하거나 이해를 도와주지 못한다면 자칫 오류가 될 수도 있는 여러 여건들이 현대 종교 안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신의 편에서 신이 존재하기보다는 사람 편에서 신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신을 향하여 자기의 영감과 영성을 총동원하여 신앙을 표출하려 한다. 하지만 가톨릭 뿐만 아니라 어느 종교도 그 종교가 갖는 본질을 상실하지 않으려는 노력들을 살을 깎는 아픔만큼이나 어렵게 감내하는 것으로 안다. 또한 그래야만 한다. 신께서 인간편에 서셨다면 인간은 신의 변함없는 사랑과 자비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모습 안에서 순종하려 노력해야할 이유가 있지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 자매님의 설명이 맞다.
십자고상의 주님께는 교리서의 해설처럼
고통의 오상과 조롱거리인 명패와 패배자의 죽음이 있다.
그 슬픔은 부활이라는 약속을 증명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 가톨릭 교회가 준성사적 가치로 삼아 온 십자고상은
우도쪽으로 고개를 떨구신 주님이시다.
그런데 좌도쪽으로 고개를 떨군 예수님상을
그리스도의 수난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알고 들어보면 맞는 말씀이시다.
좌도는 주님을 비난하지 않았던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는 조롱!
그것이 주님의 수난을 대표하는 마지막 총정리가 맞다.
그리고 우도는 저분은 죄도 없으신 분이시라는 믿음을 보임으로서
즉석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장 받는다.
이것이 보편화 된 가톨릭 교회의 십자고상이었다.
성경의 어디에도
주님께서 고개를 어느 쪽으로 떨구셨다고 기록해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의 십자고상은
왼쪽 강도 보다는 오른쪽 강도 쪽으로 고개를 돌리셨고
수난쪽 보다는 부활쪽에 의미를 두었다.
그것! 부활!
부활이 그리스도 교회의 으뜸이며 중심이다.
그런데 급변하는 시대만큼
신학적 근거들도 포괄적으로 넓혀지고 있다. 
죄인인 인간의 관점에서
단죄하시고 심판하시는 주님 보다는
사랑이시고 구원자이신 주님의 모성적 너그러움을
각복한 현실의 현대인에게 좀 더 가까이
적극적이고 체험적으로
다가가야 할 교회적 숙명에 고심해야 한다. 
 
 
한 예를 든다면
주님을 고발한 유다의 죄를 중심에 두기 보다는
주님의 구원 사업에 필요했을 절대적인 역할의 유다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칫 유다의 죄가 정당화 될 우려성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심사숙고하고
주님께서 교회에 주시고자 한 의미나 사랑을 알아내기 위해
더 깊은 은총을 구해야 한다.
그것이 베드로의 죄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배신한 베드로!
주님을 은전 서른냥에 팔아 먹은 유다!
누구의 죄가 더하고 덜 할 것도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현대인의 굴레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음은 달랐다.
죄를 인정하고 눈물을 흐르며 주님을 따라 사는 자와
죄를 인정하고 눈물은 흘렀으나 주님을 따라 살지 않고 죽어버린 자!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으로 인간처럼 인간을 위해 사셨으므로
인간인 우리도
인간으로서 주님처럼 우리 자신을 위해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 소명이 십자가의 고통일지라도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는 길이다.
 
 
이처럼  신학적 결론의 정점들도 돌고 돌아서 
원점인 주님의 부활에 그 핵이 맞추어진다. 
 
 
 
 
 
 
 
 
 
 
십자고상의 예수님 얼굴이 어느 쪽이냐가 중요하지는 않다.
그 형상 자체가 주는 능력은 아무것도 없다.
나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그 형상이 주는 의미를 굳이 찾는다면
말씀이신 성경의 사실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줌으로서
보이지 않으신 분에 대한 영감을 상승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 얻어지는 영감의 상승은 믿음을 고찰(考察) 시켜 주기도 하고,
간혹은 기적이라는 엄청난 모습으로 성령의 개입을 증거하기도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교회의 문화이다.
그림,조각, 성가, 복음성가, 건축, 출판, 부흥회, 피정 등등  그 어떤 것도
내가 내 행실로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 정신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나의 미숙한 신앙의 걸음마를 숙달시켜 주는
분기점일 때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우리 가톨릭 교회가 오랜 전통 안에서 전해주고 있는
오른쪽 강도를 내려다 보시는 십자고상을 모실 것이다.
수난보다는 부활의 비중이 더 실린,
우리는 죄가 있지만 저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는!
오른쪽 강도의 믿음에 동참하는 의미가 되고 싶다. 
감히,
나의 어줍잖은 믿음의 세계에
우도의 믿음이 배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마도 내가 왼쪽으로 고개를 숙인 십자고상을 선택하려면
가톨릭 교회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인식의 변화들이 자리 잡았을 때나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에게 자상한 설명과 이해를 알려주신 자매님께서
성물방의 왼쪽 죄수를 향한 십자고상을 택하신 분에게는
반복하여 설명해 주시기를 바랄뿐이다.
오래동안 가톨릭 교회를 다닌 교우들일지라도,
가톨릭 교회의 준성사적 의미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 계시는 분들일지라도,
새로운 십자고상를 마련 하신다든지
작가가 마련한 변화들에 대하여 알고자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도
그런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만큼 교회 안에서 마련되어지는 많은 부분들,
즉,
십자고상 하나에도 준성사적 의미는 강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평신도들에게는 작은 하나의 의미라도 
신앙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무심결에 행하는 오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중있는 사진묵상을 겁도없이 올릴 적에는
오랜 신앙생활을 해 온 탓일 것이다.
아니! 사실은 겁 있이 올린다. 
 
 
 
 

 
※이 사진묵상에서 가톨릭 교회와 다른 입장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잘 몰라서 쓴 내용이며 가톨릭 교회와 관계가 없음을 알립니다. 또한 십자고상을 조각하시고, 많은 문화의 현장에서 신앙을 증거하시는 분들과 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분들께 심려를 끼치고져 마련한 사진묵상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우연히 집안 청소를 하다가 십자고상의 예수님 다리가 부러지면서 깊이있게 생각해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