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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상향평준화의 삶" - 5.9,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09 조회수335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5.9 부활 제6주일

사도15,1-2.22-29 요한 묵21,10-14.22-23 요한14,23-29

 

 

 

 

 

 

"상향평준화의 삶"

 

 

 

저녁 휴게시간에 마침 신문 건강 란의 기사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노인들, 아프고 지치고 외롭다.”

 

즉시 우리 연로하신 수사님께 넌지 시 물어봤습니다.

“수사님, 수사님도 아프고 지치고 외롭습니까?”

“응, 조금 아프고, 지쳐있고, 외로워”

 

조금이라는 답변에 좀 안심은 되었습니다만,

세상의 노인들뿐 아니라 장년들, 중년들 까지도

날로 아프고, 지치고, 외로워지는 추세입니다.

과연 아픔과 지침, 외로움을 완화해 갈 수는 없을까요?

 

상향평준화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얼마 전 어느 형제와의 대화도 잊지 못합니다.

“한 형제와 함께 일하기로 했습니다.

  마치 본당 사제들의 공동사목형태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혼자 일하다 보니 외롭고 힘들게 느껴집니다.”

 

너무 참신한 착상이 고맙고 고무적이지만 염려가 되어 물어봤습니다.

“힘들지 않을까요?”

“물론 힘들 것입니다. 서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형제의 말에

즉시 떠오른 ‘서로 사랑하여라.’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를 ‘서로 받아들여라.’라 바꿔도

그대로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연한 추상적인 서로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서로 받아들이며 사는 게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서로 받아들여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때 상향평준화의 삶입니다.

사실 우리와 늘 함께 계신 보호자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넓혀 주시어 도와주십니다.

 

며칠 전 읽은 “고종이 이끈 정치의 하향평준화” 제하의 기사에서

상향평준화라는 제목을 착안했습니다.

5백년 역사를 지닌 조선이 멸망을 자초한 것은

바로 고종 임금으로 인한 조정의 하향평준화 탓이었다는 것입니다.

글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아관파천(고종이 러시아 공관에 피신해 머문 일)은

  조선의 조정이 고종의 수준에 맞춰

  하향평준화를 이루는 결정적 계기였다.”

 

공동체가 하느님을 향해 부단히 업그레이드 될 때

영적 삶의 상향평준화요

반대로 명예, 권력, 재물(돈)등 세상의 가치를 향해 내려갈 때

천박한 육적 삶의 하향평준화의 삶입니다.

 

과연 우리나라는, 우리 사회는, 우리 공동체는 상향평준화의 추세입니까?

혹은 하향평준화의 추세입니까?

우리 수도자들이 끊임없이 바치는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 은총이

우리 수도공동체를 하느님을 향해 부단히 상향평준화를 이루어줍니다.

함께 살아 상향평준화지

혼자 살아서는 상향평준화의 영적 성장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십시오.

이래야 상향평준화의 삶입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 점을 꼭 집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주님 사랑의 진정성은 그대로 말씀을 지킴에서 들어납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말씀을 지킬 때 상향평준화의 삶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입니다.

말씀은 우리 발의 등불이요 우리의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영혼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입니다.

영혼의 영혼이 바로 말씀이요,

우리를 부단히 치유하고 정화하고 성화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이며 권능이며 사랑입니다.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이 진정 건강하고 행복한 부자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바로 인간의 본질이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아있다 하나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삶입니다.

육신의 본능만 남은 짐승과 같은 육적 삶뿐이라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정작 무서운 것은 육신의 병 이전에 영혼의 병이요,

육신의 영양실조 이전에 영혼의 영양실조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킬 때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도 우리와 함께 사시고,

하느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 희망, 사랑의 영양분이 계속 공급될 때

튼튼한 영육의 삶에 상향평준화의 삶입니다.

이래서 공동체가 정성껏 바치는 미사보다 영육에 좋은 영양식은 없습니다.

 

 

평화롭게 사십시오.

이래야 상향평준화의 삶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참 좋은 평화의 선물입니다.

종파를 초월해 모두가 공감하는 평화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연설문의 일부가 생각납니다.

“다른 종교, 다른 민족, 다른 문화, 다른 전통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공통의 목표가 있습니다.

  세상의 평화, 내적평화입니다.”

바로 주님 주시는 평화가 이런 평화입니다.

세상을 떠나실 때나 부활하시어 다시 오셨을 때

우선 선사하신 게 평화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입니다.

절망에도 불구하고 평화요,

슬픔에도 불구하고 평화요,

불안에도 불구하고 평화입니다.

이런 내적 평화의 보물보다 더 좋은 보물은 없습니다.

세상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평화요

세상 그 누구, 무엇도 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세상의 거짓 평화를 위해 애쓰지 말고

이런 주님의 참 평화를 얻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이런 평화를 사는 이들 무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순리에 따릅니다.

세상이나 공동체에서도,

심지어는 자연에서도 공존공생의 평화를 추구합니다.

문명의 시대라지만

거짓과 불의, 탐욕과 폭력의 야만 시대처럼 느껴집니다.

균형과 조화, 질서로 표현되는 주님의 평화입니다.

공동체에서나, 자연에서나

균형과 조화의 평화를 깨는 모든 행위들은 종식되어야 합니다.

4대강 공사 강행으로 인해 무수히 죽어가는 생명들,

깨어지는 자연의 평화가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좌우사방으로 강물같이 흐르는 평화가,

평화의 강이 공동체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상향평준화의 삶을 이루어줍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이래야 상향평준화의 삶입니다.

사랑은 감상이나 낭만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규칙에서

그의 수도승들에게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는 사랑을 실천하라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길 빼놓고

사람이 되는 길은, 내적 상처가 치유되는 길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구체적으로 ‘서로 받아들여라.’입니다.

서로 받아들여 공존공생의 사랑이 평범하나 항구한, 위대한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 없는 사랑,

짐을 가볍게 해주는 사랑,

짐을 져주는 희생적 사랑 모두가 포함된 사랑입니다.

 

1독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원로들의 결정사항이

바로 주님 사랑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처럼 짐을 덜어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실천할 때 상향평준화의 삶입니다.

 

이런 사랑의 모범이 사도들이 칭찬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입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입니다.”

주님 사랑에 목숨을 내놓은 두 사도들 덕분에

상향평준화를 이룬 안티오키아 교회공동체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깊이는 사랑의 깊이입니다.

사랑 없이는 하느님을, 사람을 알지도 만나지도 못합니다.

평생 공부해야 하는 공부가 서로 사랑하는 사랑 공부요,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들인 우리들입니다.

매일 초보자처럼 내 작고 좁고 얕은 사랑에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주님과 함께 사랑을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상향평준화냐 하향평준화냐 갈림길에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나라에 국격(國格)이 있고 개인에 인격(人格)이 있듯이

공동체마다 그 격이 있습니다.

 

격조(格調) 높은 상향평준화의 삶의 절정이

바로 2독서 요한 묵시록의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공동체입니다.

다음 아름다운 묘사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말씀이, 사랑이, 자유가 완전히 실현된

공동체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이런 공동체를 향하게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지키십시오.

평화롭게 사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격조 높은 상향평준화의 이상적 공동체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이 길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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