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서로 섬기십시오! (1베드 5,5)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12 조회수810 추천수15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활 6주간 수요일 - 서로 섬기십시오! (1베드 5,5)

 


 

제가 사제가 되어 유학을 나오면서 교황청 선교 한국 지부에서 일하시는 한 수녀님의 부탁으로 두 달에 한 번씩 선교에 관한 글을 써 드리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저희 교구에서도 아프리카 수단으로 선교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구장 주교님께서는 처음으로 선교를 나가는 세 분의 신부님들을 위해 파견미사를 크게 해 주셨습니다.

강론시간이 되자 주교님께서 제가 선교잡지에 쓴 글을 읽어주셨고 그것으로 강론을 대신하였습니다.

보좌신부밖에 하지 않은 한 젊은 사제의 글을 교구장 주교님께서 당신 강론 시간에 선교 나가는 선배 신부님들과 참석하신 많은 신부님들, 신자들 앞에서 읽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보좌신부하면서도 강론 때 교구장님의 특별 메시지를 한 번도 읽어주지 않았습니다. 왠지 강론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핑계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주교님께서는 큰 미사에서 한 젊은 신부의 글로 당신의 강론을 대신하신 것입니다. 제 글이 읽히고 안 읽히고를 떠나서 주교님의 겸손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당신 뜻대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만 이야기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 드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겸손 되게 자신의 생각을 뒤로 숨기고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부께서는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신 성자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성령님도 똑 같이 예수님께 들은 것만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니라 성자를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물론 예수님 편에서도 당신에게 짓는 죄는 용서받을지라도 성령을 거슬러 짓는 죄는 이 세상에서도 저승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며 성령님을 더 높여주십니다.

저는 이런 것을 읽으면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라 하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한 마디도 하시지 않으시고, 아들은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것만 말씀하시고, 성령님은 아드님이 하신 말씀을 잘 이해가게만 해 주시는 등, 서로서로 자신을 낮추시고 상대를 높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상대를 섬기는 것이 곧 하느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도 서로서로 상대를 높여주는 모습이 있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에 그와 반대로 우리가 인정받고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전 교구장님께서 저를 높여주신 것에서 감히 따라가지 못할 겸손과 사랑을 엿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여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사랑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베드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1베드 5,5)

그러나 여기에 쓰인 단어는 단순이 서로 겸손하게 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엥콤보오마이’, 즉 ‘허리를 동이고 앞치마를 입고 상대에게 시중을 들라’는 구체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서로서로 높아지려하지 말고 상대방의 종이라고 생각하고 서로에게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서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시면서도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되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도 서로 섬기십니다. 우리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섬김’을 본받아 서로서로 섬기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짧은 묵상>>

어떤 분이 저에게 “박사를 꼭 따고 오세요.”라고 하기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한국에선 아직 학위가 우선이에요. 학위가 있어야 사람들이 들어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는 학위 조작도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위라는 것은 어쩌면 사람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어떤 위대한 성경학자는 예수님의 기적이나 부활을 있는 그대로 보기 보다는 그 안에서 상징적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골 할머니들은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셨다면 그 기적을 그대로 믿습니다. 어떤 성경 박사님은 성경에 쓰여 있는 것 중 가장 확실하게 예수님이 하셨던 말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불렀다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그 외의 나머지는 첨가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첫영성체 교리반 아이들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지옥과 연옥을 부정하며 어린애 장난과 같은 것이라 결론을 내립니다. 그 사람 말대로 어린아이들은 그것을 잘 믿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교회와 마리아, 성사 등은 사람들이 다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여 다른 종교를 만들어 가톨릭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많은 신자들은 아직도 성모성지에 가서 열심히 묵주 알을 돌립니다.

결국 공부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까지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공부를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 바에는 자신과 교회를 위해 공부를 포기하는 편이 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감당하지 못한다면 많은 강의를 듣고 많은 책을 읽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진리들을 감당하려면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은 많은 양의 공부를 해서가 아닙니다. 진리는 아주 단순해서 아이들도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공부만 한다면 결국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읽고 쓸 줄도 몰랐던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나, 신학을 정식으로 접해보지 못하고 젊어서 돌아가신 소화 데레사 등이 교회 박사로 칭송받는 이유는 그들이 공부를 많이 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진리를 깨쳤기 때문입니다. 지옥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카타리나 성녀에겐 당해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지옥을 직접 보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단순합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진리를 깨우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더 알아가기 위해 공부를 할지라도 그 방법은 오직 진리의 성령님을 통해서만이 합당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진리를 드러내 보이시고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그것을 감추시니...”

 

 

   

 

<아버지 뜻대로>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