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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매일미사 묵상과 강론] 승천은 새로운 강림 - 강길웅 세례자요한 신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15 조회수493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0년 5월 16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주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루카 24,46ㄴ-53)


Then he led them out as far as Bethany,

raised his hands, and blessed them.

As he blessed them he parted from them

and was taken up to heaven.


 


말씀의 초대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사십 일 뒤에는 하늘 나라로 돌아가셨다. 그분의 승천이시다. 스승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 제자들의 부족함을 도와줄 분이시다. 그런데도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은 어쩔 줄 모른다. 천사는 그분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알려 준다(제1독서). 바오로는 에페소 교우들을 격려한다. 장차 가게 될 하늘 나라를 떠올리며 희망을 잃지 말라고 한다.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분께서 도와주실 것을 전한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이들은 마침내 구원을 얻을 것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신다. 그분께서는 죄의 용서를 약속하신다.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을 전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의 산 증인들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대기권을 뚫고 ‘하늘 저쪽’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표현’일 뿐입니다. 표현을 내용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튼 승천의 의미는 ‘본디 모습’으로 되돌아가신 데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당신을 증언하라 하셨습니다.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당신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부활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야 합니다. 부활은 ‘모든 것’을 잃었다가 ‘다시 얻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우리에게도 그런 사건은 있었습니다. 죽음에서 소생한 것은 아니지만, ‘죽음 같은’ 상황에서 일어난 ‘반전’입니다. 그것을 증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승천은 부활의 결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계시지 않고 하늘 나라로 가셔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승천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신앙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가 다시 찾으신 분의 이야기로 해석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주님 승천 대축일을 맞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겠지’ 하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주님 승천의 교훈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늘 나라로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마다 되새겨야 할 자세입니다. (신은근 바오로 신부)

 


승천은 새로운 강림


-강길웅 세례자요한 신부-

 


제1독서 : 사도 1,1~11 (예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제2독서 : 에페 1,17~23 (그리스도를 하늘나라에 불러 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복 음 : 루카 24,46~53 (예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면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은 크리스천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확신과 희망을 안겨 주게 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리스도와 같은 승천의 영광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이 다음 우리에게 돌아올 영광의 예표요 보증인 것입니다.


성서에 보면, "사람의 아들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니 7,13). 유대인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내용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하늘에 떠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말한 작가는 루가뿐입니다. 루가는 사도행전과 루가복음 두 권의 책을 썼는데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승천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사실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루가는 예수님의 승천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 영광의 예수님은 먼 나라에 계셔서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이 이별된 것이 아니라 새롭고도 더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은 이별의 슬픈 장면이 아니며 새롭게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만나는 기쁨과 은혜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천'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모습을 감추신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먼 거리로 가신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오셔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승천은 떠나심과 동시에 새롭게 찾아 주신 사건입니다.


얼마 전에 자녀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떤 자매님이 찾아와서는 이야기 끝에 주님은 자기를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너무도 고생이 많았고 너무도 서운함이 컸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오해입니다. 주님은 우리 생애의 어느 한 시기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그분은 우리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지옥의 문턱을 넘어서기까지는 하느님은 항상 우리에게 희망을 갖고 계시며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힘들거나 어려운 때, 그리고 슬프거나 외로울 때 주님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높은 산을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 승천 대축일에 산이나 들에서 야외 미사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념이지 산이나 들만이 주님을 만나는 장소는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선 마음만 먹으면 됩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으면 그분은 또 보여 주시고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또 그 분이 우리에게 대답을 주십니다. 어떤 장소와 시간도 구애받지 않으시고 원하는 시간마다 원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어떤 형제가 예수님을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했지만 늙어 죽을 때까지 그 꿈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도 않았고 또 사랑하시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을 때 신부님께 그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이 그러셨습니다.


"평생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 사셨으면서도 하느님을 못 보았다고 하십니까? 자, 여기 예수님을 만나십시오."하며 성체를 영해 주시는데 형제는 그때 비로소 주님의 현존을 체험했다면서 지나온 생에 대한 감사와 회개를 눈물로써 고백했다고 했습니다.


옛날 필립보가 예수님께 "아버지 좀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하셨습니다. 우리도 사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보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을 꿈 속에서라도,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승천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의 그 모습으로 우리 앞에 존재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하느님만의 특별한 존재 방법으로 우리 앞에 계실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뵙지 못하는 것은 다만, 우리의 마음과 신앙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승천의 믿음을 활짝 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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