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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우리보다 훨씬 이전부터 ....... 김상조 신부님
작성자김광자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19 조회수393 추천수6 반대(0) 신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이 말씀하신 대로, 혹은 하느님이 뜻하신 대로라는 뜻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참 많으신 것 같다.

기록된 대로, 이미 아주 오래전에 기록된 대로,

아주 먼 옛날부터 그분이 염려하셨던 대로,

우리가 처할 곤경을 미리 아시고 우릴 위해 무언가 안배하셨음을 짐작케 하는 말씀

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보호와 관심아래 놓여있다.

그분은 우리가 어찌 될 것인지 미리 아시고 준비하신다.

이렇게 우리가 그분의 관심아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루 하루 그분의 관심 덕분에 살아가는 것 같다.

며칠전 어느 형제분이 리비아에서 건축사업을 하시는데

아주 오랜만에 고국땅에 오기 위해 비행기를 예약했는데 어찌 어찌 하여 그 비행기

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비행기가 추락하고 말았다. 100여명이 사망하는

큰 사고였다.

이런 경우 우리는 우리 각자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을 느낄 수 있다.

 

많은 경우 우리가 세운 계획은 사실 알고보면 하느님이 세운 계획이었던 것을 경험

한다.

성공과 실패 모두 그분의 허락 안에 있다.

이태석 신부님의 죽음을 보고 많은 이들이 애석해했다.

하지만 그 또한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부르심이었을 것이다.

 

누나 수녀가 있는 서울 분도회 바자회에 다녀왔다.

그 행사를 위해 수녀님들은 새벽 일찍 미사를 바치고 손님을 맞아야 하는데 그 미

사를 바치기 위해 갔다. 그곳에 가기 위해 그 전날 기차를 타고, 전철로 갈아 탔

다.

바자회를 돕고 미사를 바치기 위한 그 목적으로 그곳에 갔다.

여러분은 어떤 목적을 위해 하루를 보내고 있는가?

해마다 성령강림 대축일을 기념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것은 다음 주일이면 찾아오겠지만 성령강림은 어느날 갑자기

요이 땅! 하고 일어난 유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세상창조 때에도 있었고, 예수님 세례 때에도 있었고,

방금 우리의 상상 가운데에서도 있었고, 앞으로도 언제든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념하는 성령강림 대축일 사건은 그 성령의 은총이 엄청난,

커다란 폭발력을 일으킨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제자들끼리만 알음 알음으로 모여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던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폭발적인 성령의 은총을 입어서 온갖 외국어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거리로 뛰쳐나가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십니다. 주님이시고 하느님

이십니다!.”

하고 외치게 만든 아주 특별한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 성령께서는 우리 순교선조들에게도 그런 힘을 주셨다.

글도 제대로 모르던 분들이 형장 곳곳에서

“나는 결코 하느님의 배신할 수 없으니 어서 나를 죽이시오!”하고 외치게 만들었다.

이것은 성령의 작용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다.

 

그런 성령의 은총을 구해주는 것이 강복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당장 그런 폭발적인 은총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 모두 지금 당장 순교의 칼을 받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이렇게 풍성한 종교의 자유가 주어져 있는 이런 시대에 그런 순교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오히려 광신이 되기 쉽다.

하느님은 참으로 능력있는 분이시지만 결코 과격하게 일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가 너무나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들을 통해 조용하게

그리고 천천히 일하시는 분이시다.

 

그런 것이 강복이다.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길 빌어주는 마음,

그런 것이고 그것은 다른 말로 관심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강복행위는 그분이 우리에게 얼마나 관심이 많으신지 보여주는 단적인 모

습이다.

작은 입맞춤이 개구리를 왕자로 바꾸어 주었듯이,

우리의 작은 관심이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바꾸고 마음을 열어준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든 언행은 우리에 대한 당신의 관심이 얼마나 지대한지 보여

준다.

우리가 기념하는 승천마저도 제자들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버리고 마는 것

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령께 자리를 내주기 위함이었고,

그 자리바꿈을 통해 더욱더 가까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의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승천은 지상생활의 종결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우리 곁을 떠남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함께하심, 영원히

있기 위함이었다.

마태복음에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떠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메이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팝 가수 Rod Stewert의 노래 Sailing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I am sailing. I am sailing. home again, cross the sea. I am sailing stormy

waters.

To be near you, to be free.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서, 그래서 참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지금 우리는 이 세상을

 항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노래 마지막 구절에는 이 당신이 주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Oh Lord, to be near you, to be free.

 

누군가와 함께 있기 위해서, 그와 아주 가까이 있기 위해서는 자기로부터 떠남이

 있어야 한다.

나를 버릴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을까?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무얼 해주면 좋을

까?

지금 전해주는 것이 좋을까? 따로 만나서 전해주는 것이 좋을까? 이런 관심이다.

그 지극한 관심으로 제자들에게 강복해 주시고 또 성령을 보내주셨다.

 

계속되는 전쟁과 굶주림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프리카의 톤즈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음악을 가르치고 총과 슈류탄 대신에 트럼펫과 피리와 북을 손에 들

게 만들어버렸던

고 이태석 신부님을 통해서,

일부러 밥을 태워서 누룽지를 만들고 가난한 학생에게 더 많은 거스름돈을 주는 밥

집 할머니를 통해서,

그리고 쉽지 않은 살림이지만 그래도 수입의 십분의 일을 더 어려운 곳을 위해 기

부하는 수녀원의 선택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가르쳐주고 알려주

실 것”이란 말씀의 뜻도 그런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성령님의 활동을 통해 더 깊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래서 예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그런 목적,

그런 관심사에 온통 빠져있던 분이시라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 승천하셨고, 그래서 성령이 오실 때를 기다리라고 분부하

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갖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

셨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갖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에게 관심을 가

지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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