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호기심과 관심의 차이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22 조회수787 추천수16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활 7주간 토요일 - 호기심과 관심의 차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목록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보면 이것저것 꼬치꼬치 잘 캐묻는 사람들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아는 것을 다 이야기 해 줄 때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것은 좀 감추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관심을 갖는 것 같지만 다 같은 관심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또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캐묻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순교를 당하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에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아마도 베드로가 요한에 대한 참다운 사랑이 있어서가 아니라 호기심이 앞서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알아도 상관없고 몰라도 상관없는 것에 단지 호기심을 못 이겨 들추어내려는 경향은 없을까요?

 

호기심과 관심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문제는 가끔 호기심이 관심인 것처럼 가면을 쓰고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입니다. 호기심은 단순히 자신의 궁금증을 채우려는 것이고 관심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그 안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하와가 뱀을 만나 뱀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하와가 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뱀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하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기심이란 자신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에 이기적이고 사랑을 거스릅니다. 결국 이 호기심이 온 인류에 죄가 들어오게 하는 계기를 만든 것입니다.

호기심은 이렇듯 큰 죄를 짓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짓는 죄들 안에는 대부분 이 호기심이 들어와 있습니다. 요즘은 어린 아이들도 성적인 것에 많이 노출이 되어있고 아이가 아이를 임신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겠습니까? 인간은 모르면 좋을 악까지도 다 알려고 해서 그 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학을 공부하는 데도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신학은 분명 하느님을 더 알고 그 분을 더 사랑하기 위한 학문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서 나 자신도 모르게 그 지식을 통해 내가 커지고 싶은 욕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의 교수님은 다 좋으신데 다른 신학자들을 좀 자주 비판을 하십니다. 물론 그 분의 입장에서는, 남의 것들을 짜깁기하고 그것이 마치 자신의 신학인 양 말하는 신학자들이 어리석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판하는 일면에는 은근히 자신의 현학을 자랑하는 마음이 묻어납니다.

이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이런 것들을 학교에서 왜 가르치고 배워야하는지 통 이해가 안 갈 때가 많습니다. 또 단순한 이야기를 왜 그렇게 어렵게 가르치고 시험을 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판하는 가운데 저도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사람을 더 사랑하려는 관심으로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머리를 채우려는 이기적인 호기심에서 한 것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어떤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사랑과 겸손을 증가시키는 목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어느새 내 자신의 교만만 키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을 쌓아가는 것에 있어서도 이렇듯, 자주 내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만 공부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지식은 그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에게도 독이 됩니다.

 

살아가면서 무엇을 알려고 할 때, 정말 상대를 위한 것인지 나의 호기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인지 내 스스로 잘 살피며 살아야겠습니다. 참 사랑은 자신을 잊고 상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짧은 묵상>>

하느님은 사울을 이스라엘을 이끌 영도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영도자는 백성의 지지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들의 입에서 “사울은 수백 명을, 다윗은 수천 명”을 쳐부수었다는 노래를 듣게 됩니다. 민심이 다윗에게 쏠린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면 그 원인을 제거해야 마음이 놓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 사울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실제로 왕권을 다윗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도 이스라엘의 왕으로 그리스도가 나타나자 위협을 느껴 그 분을 갖은 중상모략으로 제거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 분은 사실 당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나라를 세우는데 성공하십니다. 예수님은 남이 자신을 죽이든 살리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완수하십니다. 마치 옆을 보지 못하게 눈이 가려진 말처럼 앞만 보고 가십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나설 때 목적지가 없이 나서지 않는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다 하늘로부터 주어진 길이 있습니다. 사울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고 오늘의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다만 그 ‘소명’을 깨닫고 그 목적을 향해 걸어가면 되는데 사람들은 자꾸 ‘저 사람은 어디를 가고 있을까?’ 하며 주위를 기웃거리게 됩니다. 그러다가는 정작 자신의 길을 올바로 가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다보면 잘 아는 길도 지나쳐 버릴 때가 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길을 놓치고 더 정신을 놓으면 사고 나기 일쑤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소명을 매 순간 살아나가는데도 엄청난 주의력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위에 너무 정신이 팔려 결국 내 길도 제대로 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의를 더 가져달라고 하며 우리가 마치 사랑이 적은 사람처럼 핀잔을 줍니다. 그러나 내 길을 잘 가고 있는 한에 있어서 주위를 둘러보아야지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고라도 난다면 큰일입니다. 운전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운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약간은 주위가 흐트러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의 운명은 그리스도와 같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뒤에 따라오는 요한의 삶도 궁금합니다. 예수님은 남의 일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쓰지 말라며 이렇게 이르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무관심은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당연히 이웃을 사랑하고 관심 가져주려고 노력해야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나의 삶이 흐트러질 정도로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 또한 해악을 줄 수 있습니다. 각자는 각자의 소명과 삶이 있습니다. 사랑은 넘어지는 사람과 함께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나라도 똑바로 서 있어야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줄 수 있을 것입니다.

 

 
 
 
 
< The prayer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