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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령님’과 ‘에너지’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23 조회수1,081 추천수13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령강림 대축일 - ‘성령님’과 ‘에너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10일이 지나자 성모님과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다락방에 성령님께서 불혀의 모양으로 각 사람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성령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사랑’입니다. 또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인간들에게 내려오셨다는 의미는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이 시작된 날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사랑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짝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했지만 인간은 그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안으려고 하는 사람의 심장을 가시로 찔렀습니다. 그 가시들이 바로 우리의 죄였습니다.

거북이가 자신의 껍질 속으로 들어가면 인간의 힘으로는 그것을 끄집어 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거북이도 불 곁에 놓아두면 더워서 견디지 못하고 머리와 다리를 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죄를 짓고 그렇게 움츠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 곁에 오셔서 성령의 불로 움츠려 있는 이들을 사랑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그 사랑에 응답한 이들과 서로간의 사랑을 시작하게 된 날인 것입니다.

짝사랑은 힘들고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다가 상대도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서로 사랑을 고백할 때의 행복감은 매우 큽니다. 성령강림이 바로 그러한 날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교회는 성령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이고 마리아를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계약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며 죄를 용서해주라고 하십니다. 이는 고해성사를 세우시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죄를 용서해주고 그 용서를 받으면 하느님께서 용서해주시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에너지’입니다. 용서도 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힘이라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가장 큰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서 인간들의 손에 넘어가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아내시고 그 박해자들의 ‘용서’를 빌 때가 가장 강했던 때입니다. 누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에너지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이들은 이런 힘을 발휘합니다. 스테파노도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청하며 죽었고, 마리아 고레띠도 자신을 수십 차례나 찔렀던 사람을 그 어린나이에 용서하고 함께 하느님나라에 가기를 청했습니다. 이것이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해주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성령님을 받으라고 하신 이유는 성령님이 없으시면 용서할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위에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해서 고통스럽고 그래서 용서하고 싶지만 그럴 힘이 없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본성대로 미워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시면 용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게 됩니다. 본성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먼저 주시고 용서해 주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용서는 우리가 하는 용서와는 다릅니다. 이 용서는 하늘까지 용서해 주는 용서이고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교회에는 성모님의 믿음 덕분으로 조금의 성령님의 에너지가 아닌 ‘완전한’ 하느님이신 성령님의 권능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오늘 성령강림 때 제자들이 한 가지 언어로 이야기해도 모든 나라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듣게 되었을까요? 바로 성령님은 용서를 통하여 바벨탑의 교만으로 분열되었던 사람들을 일치시키는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성령님이 계시지 않으면 ‘에너지’가 없어서 용서도, 절제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는 분열이 생기게 됩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겐 예쁜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다른 아들 암논이 그 누이를 몹시 좋아했습니다. 이래저래 고민하다 암논이 아픈 척을 했고 아버지 다윗에게 누이동생 다말이 자신의 병간호를 하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렇게 암논은 여동생과 단 둘이 있을 수 있게 되었고 여동생을 강제로 겁탈하게 됩니다. 동물적 본성을 감당하지 못했던 암논은 판단력도 흐려져서 이런 일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겁탈하고 났더니 여동생이 미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를 몹시 모질게 내쳤고 그의 오빠 압살롬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도 자신의 분노를 감당할 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잔치를 벌여 암논을 취하게 하고 부하들을 시켜 암논을 암살하였습니다. 자신의 동생을 욕보인 형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아들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남의 아내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고 욕정이 생겨 그와 동침을 하였고 그 여자는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군인으로서 다윗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몇 차례나 남편 우리야를 불러 술을 마시게 하고 아내와 잠을 자게 했지만 그는 부하들이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데 자신이 어떻게 편히 아내와 잘 수 있겠느냐며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욕정에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백성의 원성을 두려워 한 다윗은 장군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전쟁터에서 그를 죽게 하라고 지시하였고 그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판단력 부족으로 간통을 넘어서서 살인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왕이었지만 자신의 본성도 이기지 못하는 아주 약한 인간이었습니다.

문제는 암논이 자신의 딸을 겁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눈감아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원한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던 압살롬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용서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왕권에서 쫓아내고 그의 아내들을 공개적으로 강간하였습니다. 다윗도 자신이 죗값을 치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압살롬은 며칠 동안 아버지의 왕권을 빼앗았지만 역시 아버지보다 더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전쟁터에서 죽고 맙니다.

육체적인 욕망으로부터 시작한 동물적 본성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한 집안이 겪었던 일이고 이런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에 한창 시끄러웠던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도 바로 용서할 수 있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많은 재산과 힘을 지니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자신은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이고 그런 것이 이성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결국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만드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를 한 번 봅시다. 영국에서 가장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대를 떠올리면 엘리자베스 여왕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25세에 여왕으로 즉위하여 40년이 넘도록 최대번영을 누리게 한 인물입니다. 다윗도 40년을 지배하였지만 엘리자베스 여왕만큼 정치를 잘 하지 못하였습니다. 좀 전에도 보았지만 집안에 바람 잘 날 없던 시기였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다윗이 가장 훌륭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패배를 모르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유일한 인물이고 그의 재위 기간에 불미스러웠던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정치를 잘 할 수 있었을까요?

엘리자베스 여왕도 젊었을 때 좋아하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스페인 왕의 결혼까지도 물리칠 정도로 그 사람을 사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반을 꾸미는 사람들 중에 자신의 남자친구도 가담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고통스러워합니다. 정부에 반항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특별히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은 살려주라고 명령합니다. ‘용서’한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얼굴을 흰색으로 칠하고 평생 그렇게 살아갑니다. 얼굴을 흰색으로 칠했다는 뜻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평생 처녀로 결혼을 하지 않고 오로지 백성을 위해서만 살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사람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고 만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 그녀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평생 마음에 지니고 살았지만 큰 뜻을 위해서 자신의 욕정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야 어째서 다윗 왕보다 엘리자베스가 정치를 잘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갑니다. 그녀는 ‘용서’하고 또 자신의 본성을 ‘절제’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 치고 박고 싸우면 다윗이 이길 수 있겠지만 실제로 다윗은 엘리자베스보다 훨씬 약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도 제어할 수 없었던 인물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평생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을 정도로 강한 절제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물적 본성으로 사는 사람은 동물적인 판단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곤란한 일만 당하게 됩니다.

 

참고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강한 것입니다. 권위 있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닙니다.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 더 강한 것입니다. 보복하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더 강합니다. 본능대로 살아가는 것이 강한 것이 아닙니다. 본능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 더 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힘들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짧은 묵상>>

오늘은 성령강림입니다. 성령님께서 공식적으로 교회에 내려오시고 ‘공식적’으로 교회가 시작된 날입니다. 그러나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강림 때 성모님이 함께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시작될 때 성모님이 계셔야함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교회는 개신교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 성 요한은 만약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발현하시면 그 분의 얼굴에 침을 뱉으라고 권고합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라고 바로 믿어버리는 것은 곧 ‘내가 그 분을 만나기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교만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이나 성모님이 발현하면 마귀가 자신을 유혹하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발현이 진짜라면 그 분들은 우리의 겸손함을 오히려 칭찬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교만은 우리 교회 안에서도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하면서 사실은 세례를 받았으니 당연히 성체를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성체를 영하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들도 빵과 포도주 위에 강복을 하면 자신들의 믿음과 행위로 그것이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아무리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더라도 그 분과 온전히 한 몸이 될 수 없고 우리의 믿음으로는 빵과 포도주를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거나 그것을 받기에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하느님의 ‘모든 것’입니다. 인간 중 누가 하느님의 모든 것인 성령님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유치원생들에게 어려운 신학을 이야기 하는 것이 가치가 없듯이 받아들일만한 사람에게 귀한 것을 주는 법입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어서는 안 되듯이 가장 고귀한 성령님도 죄인들의 집단인 교회에 직접적으로 주실 수는 없으십니다. 요한은 세상에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교회의 개개인은 어느 누구도 하느님을 온전히 받을만한 자격을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도 합당하게 성사에 참여하고 있으니 어쩌면 십자가의 성 요한이 우려하는 영적 교만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마리아의 중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주시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것은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성령님을 교회에 주시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게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 성령님을 받을만한 유일한 분이신 성모님의 역할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사도들의 모후이기도 하십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포도주, 즉 성령님이 다 떨어진 교회에 성령님을 주시기를 거부하십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교회 성직자들에게 “내 아들이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거부하시지 않았다면 성모님의 믿음의 강력함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부정까지도 긍정으로 이끄시는 믿음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러나 사실 잔치 책임을 맡은 사람은 그 포도주가 어디에서 오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도 성체성사를 하고 고해성사를 하지만 그 성령님이 성모님의 중재로 교회에 오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누구의 중재로 이루어진 것일까요? 필립보도, 안드레아도 또 다른 사도들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십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가나의 혼인잔치와 마찬가지로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사제의 믿음으로 일어나는 기적이 아닙니다. 그 완전한 기적은 완전한 믿음을 지니신 분만이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일어나는 모든 성사는 성모님의 중재가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누구도 그에 합당한 믿음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모님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셨듯이, 성령님 또한 성모님을 통하여 교회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만약 갈멜산에서 이스라엘에 유일하게 남아있었던 엘리야가 없었다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사를 수 있었을까요? 그 엘리야의 중재가 아니었다면 하늘에서 비가 내릴 수 있었을까요? 그 이전으로 내려가자면 세상에서 가장 겸손했던 모세가 없었다면 시나이 산에 올라가 십계명 판을 가지고 내려올 수 있었을까요? 이 모든 중재가 없다면 은총은 세상에 오실 수 없습니다.

마치 강물을 그대로 마실 수 없어 취수장에서 정수를 하고 각 가정으로 보내는 것처럼 성모님은 그 보이지 않는 취수장의 역할을 하십니다. 하느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을 부어주시기 위하여 모세에게 부어주셨던 영을 조금씩 나누어 원로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십니다. 이렇듯, 세상에 온전히 성령님이 오시기 위해서는 그 분을 받으실 온전한 그릇, 그 이전엔 성령님을 통하여 성자를 잉태하셨던 그 그릇, 성작인 성모님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집에서 물을 마시면서 그 물이 강에서 곧바로 오는 것이라 믿고 또 취수장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은총이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면, 또 그리스도의 거부까지도 성모님의 청으로 꺾을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님을 충만히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성모님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강림을 성모님 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이 곳에>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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