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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령을 받아라.” - 5.2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23 조회수378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5.23 주일 성령 강림 대축일

사도2,1-11 1코린12,3ㄴ-7.12-13 요한20,19-23

 

 

 

 

“성령을 받아라.”

 

 

 

주님은 진실하십니다.

약속하신 대로 주님은 성령 강림 대축일에

협조자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주님의 얼이, 성령이 온 누리에 충만한

신록의 5월 성모성월에 맞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단비처럼

우리 메마른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성령의 단비요,

밤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햇빛처럼

우리 영혼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성령의 빛입니다.

신록의 생명으로 빛나는 5월의 초목들,

그대로 성령 충만한 삶, 성령 충만한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수도원 주차장 옆 흐드러지게 피어난 이팝나무꽃들,

성령의 사랑으로 활짝 피어난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오늘 복음의 주님은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참 좋은 성령의 선물을 주십니다.

육신의 생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을 받아 영혼이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꽃처럼 활짝 피어나야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일 때 비로소 온전한 참 나의 실현입니다.

성령의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들어보셔요.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또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성령,

생명을 주는 성령입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성령,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는 성령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은혜는 얼마나 풍요로운지요.

성령 충만한 사람이 얼마나 큰 내적부자의 삶인가는

다음 성령의 열매와 은혜를 보면 단박 들어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이런 성령의 열매 가득한 자들은

천하무적의 사람들이자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잘 아시는 성령칠은 역시

거칠고 험한 세상 살아가는 데 얼마나 필요한 덕인지요.

주님 찾는 슬기, 주님 말씀 통달할 맑은 지력,

옳은 길로 나아갈 바른 의견, 모든 고난 인내할 굳센 의지,

믿음의 길 따라 갈 깊은 지식, 주 하느님 섬기올 타는 효성,

두려움의 은혜가 바로 이들이 성령 칠은입니다.

위로자이신 성령께 간절히 청할 때 주시는 성령칠은은사입니다.

프리즘을 통과한 하나의 햇빛이 일곱 색깔의 무지개로 들어나듯

한 성령 역시 일곱 개의 은사들로 표현됩니다.

 

성령 자랑을 하려면 끝이 없기에 성령 자랑은 여기서 이만 그치고

성령 충만한 공동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공동체와 유리된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환상입니다.

늘 공동체의 맥락 안에 있는 사람들이요

하여 공동체적 인간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역시

제자들의 공동체, 교회 공동체가 전제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공동체, 평화와 기쁨의 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참 좋은 선물이 평화와 기쁨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성령만이 줄 수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기쁨이 성령 충만한 공동체를 만듭니다.

불화 중에도 끊임없이 샘솟는 성령의 평화가,

슬픔 중에도 끊임없이 샘솟는 성령의 기쁨이

진짜 에버랜드 공동체를 건설합니다.

 

“평화와 너희와 함께!”

 

두려움에 안팎의 문을 모두 잠가둔 방에 들어와

제자들 한가운데에 서시며 거푸 평화를 선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똑 같은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이런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크게 기뻐하였다 합니다.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입니다.

이런 성령의 선물인 평화와 기쁨이

우리 안팎의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주님의 성령이 임할 때 두려움의 벽은 평화의 문으로 바뀝니다.

떠오르는 태양에 저절로 사라지는 밤의 어둠이듯,

성령의 선물인 평화와 기쁨의 빛에

저절로 사라지는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입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 역시

이런 성령의 평화와 기쁨입니다.

이런 평화와 기쁨의 성령으로 충만한 공동체 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공동체, 용서와 화해의 공동체입니다.

 

성령의 주님께 끊임없이 용서 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밥 먹듯, 숨 쉬듯 용서 받고 용서해야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힘입니다.

만병의 근원은 대부분 용서하지 못한 상처에서 기인합니다.

내 힘으로는 힘들고 성령의 힘으로 가능하기에

용서는 신적 사랑이라 합니다.

주님께 용서 받아야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해야 주님께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말이 좀 거칩니다만 원수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용서의 사랑이요,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복수는 찬미와 감사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다치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우리의 삶입니다.

미울수록 의식적으로라도 용서해야 하고,

하느님이 서운하고 원망스러울수록

더 열렬히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

생명의 길, 치유의 길, 축복의 길입니다.

 

성령 충만한 공동체, 용서와 화해의 공동체입니다.

용서와 화해로 하느님과의 소통이,

형제들과의 소통이 원활할 때 비로소 참 행복의 구원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당신 평화의 사도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마치 진흙으로 사람을 지어내신 후 숨을 불어 넣으시는

창세기 장면과 흡사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이자 공동체입니다.

성령 충만해야 성령의 힘으로 잘못한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고

용서와 더불어 내 자신도 치유되고 내적 자유와 평화를 회복합니다.

그러니 용서와 화해의 성령 충만한 공동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공동체,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 안에,

하느님의 사랑인 성령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를 깨달을 때 바로 구원이요 지금 여기가 에버랜드의 하늘나라입니다.

사랑의 성령, 일치의 성령은

오늘 사도행전을 통해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순절이 되어 제자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합니다.

바로 성령 충만한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이어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 앉아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했고,

외지에서 온 이들은 모두 자기 지방 말로 알아들었다 합니다.

언어, 문화, 인종의 장벽을 뛰어 넘어

하나로 소통케 하는 사랑의 성령, 일치의 성령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성령은 모두가 통하는 보편언어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성령 충만한 이 거룩한 미사 장면을 상징 하는 듯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이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자랑할 것은 내 은사가 아니라

나에게 은사를 주신 성령을, 주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깨끗한 마음의 겸손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공동체 원리는 늘 들어도 공감합니다.

성령의 사랑으로 일치된 한 몸 공동체입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누구도 절대는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 있습니다.

혼자 똑똑해서 공동체가 아니라

성령의 사랑으로 서로 보완 협력하면서,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완성되어가는 한 몸 공동체입니다.

또 이 한 몸 공동체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공동체와 고립 단절된 혼자의 삶이라면

한 몸 공동체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기는 요원합니다.

봤다면 십중팔구 환상의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성령의 사랑으로 일치된 공동체는 그대로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성령의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 비로소 사랑의 일치의 공동체요

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이 거룩한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성령을 선사하시어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고,

성령 충만한 평화와 기쁨의 공동체,

용서와 화해의 공동체,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를 건설케 하십니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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