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우리 모두 분노를 숨기고 살고 있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24 조회수417 추천수2 반대(0) 신고
윌리엄2007년에 『오두막(The Shack); 한은경 옮김, 세계사 2009년』이라는 베스트 셀러 소설을 내어 놓았다. 캐나다 태생인 영은 부모가 선교사로 활동하던 뉴기니에서 자랐다. 그곳 원주민들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경험이 있는 영에게 ‘오두막’은 모든 비밀, 아픔, 치욕적 기억들을 묻어두는 마음 속 깊은 곳을 상징한다. 그는 15년 전 아내의 친한 친구와 3개월 동안 바람을 피웠던 일이 밝혀지면서 이 오두막의 문을 열고 아내와 하느님의 용서를 빌었던 기억을 토대로 『오두막』을 썼다고 한다. 2009년 한국을 방문한 영은 내가 믿는 하느님은 내가 찾기 전에 이미 나를 알고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내면의 오두막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이 저에겐 11년이나 걸렸습니다. 저한테 치유가 가능했던 건 저의 부끄러움, 저의 잘못을 하느님께서 모두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쓸 준비를 끝낼 수 있었지요.”하고 말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William Paul Young)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겨우 5살 남짓의 재롱둥이 소녀가 아빠와 언니, 오빠들과 함께 즐거운 캠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중 사고가 발생한다.
아빠는 그 사고를 수습하느라고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수습이 끝난 뒤에 보니 소녀가 사라지고 없었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그리던 그림만 남겨 놓은 채 보이지 않았다.
막내 딸 미시가 유괴된 것이었다. 딸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경찰은 버려진 한 오두막에서 아이들만 노리는 악명 높은 연쇄살인범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된 증거를 찾아낸다. 사랑스러운 소녀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다. 아빠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빠는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하느님을 원망한다. 하느님께 그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도대체 어디 계셨느냐고,
왜 도와주시지 않았느냐고 울부짖으면서 밤을 지새운다.
아빠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오두막을 생각하기도 싫었기 때문에 오두막은 마음 속의 외딴 곳이 되어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그 외딴 곳을 그가 영원히 찾아가지 않게 내버려둘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아빠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기 위해 춥고 어둡고 아픔만 있는, 3년 반 동안 찾아가지 못했던 그 오두막으로 그를 초대하신다.
아빠는 무척 당황하지만 분노에 찬 채 그 오두막을 찾아 간다. 실로,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다시 대면하는 것은 심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것이 실수였든, 실패였든, 학대 당한 것이었든, 차별 당한 것이었든, 다툼이었든, 버림받은 상처였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의 아픔이든, 자존심에 받은 상처든, 그것을 다시 대면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수치심, 후회, 모멸감, 절망감, 분노 등의 감정이 일제히 밀려와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외면하고 무시하고 억압하고 정당화 하여 덮어 두려고 했다.
하지만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슬그머니 사라져 주지 않는다.
끌어 안고 치유하지 않는 한, 상처는 언제까지고 남아 아빠를 괴롭혔다.
진정한 해결을 원한다면, 대면하고 품어 안고 눈물로써 녹여내야만 했다.
눈물은 약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치유의 물(healing waters)’이다.
춥고 아픔만 있던 오두막은 어느새 따뜻하고 봄 향기가 나는 사랑이 가득한 오두막으로 변해 있었다. 거기에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이 계셨기 때문이다.
아빠는 오두막에서 하느님과 주말을 보낸 후 비로소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모든 상처를 치유 받게 된다. 그는 축복의 공동체로 돌아가려면 딸을 죽인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만 했다. 분노와 슬픔을 지닌 채 하늘나라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랑이 충만한 사람으로 바뀌어 갔다.>
위기를 맞을수록 하느님께 매달리는 인간의 전통적인 신앙관을 그리고 있다.
 
영성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서이다.
호주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였던 모리스 웨스트(Morris West)는 자신의 75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쓴 자서전적인 에세이 중에서 “여러분들의 단어장에는 단지 ‘감사합니다!’는 말만 있어야 합니다.”하고 말했다.
분노의 반대는 감사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감사할 줄 모르고 살고 있다.
우리는 감사하기보다는 분노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화를 내면서도 자기 합리화를 한다.
“화를 내고 있지만 다 이유가 있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환전상의 좌판을 뒤엎을 때처럼 나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야!” 우리는 자신에게 아첨하는 이런 변명을 하지 말아야 한다. 타락한 예루살렘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던 예수님과 달리 우리들의 눈물은 뜨거운 사랑의 눈물이 아니며 분열과 오해에 대한 슬픔의 눈물도 아니다. 우리들의 눈물은 슬픔과 분노의 차가운 눈물이다. 자신의 고통만 바라보면 자신의 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겉으로는 믿음이 깊고 도덕적이며 의로운 일만 하는 탕자의 형과 닮아 슬픔과 깊은 분노를 숨기고 살고 있으므로 즐겁게 춤을 추지 못하고 슬픔과 분노를 잊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다.
 
깊숙이 숨겨져 있는 분노를 시인하는 사람은 드물다. 거기에는 분노뿐만 아니라 슬픔과 회한과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과 사건들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분노를 숨기기 위해 겉으로는 관대한 척하고 선한 척한다. 또 가족에게나 친구들에게 다른 사람을 칭찬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를 과시한 후 바로 이어서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고 그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고 심하게 비난하는 수가 많다.
다른 사람을 ‘천사’나 ‘악마’로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분노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드러내놓고 칭찬하면서 자신이 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을 과시한 후 다른 사람을 심하게 비난하고 그런 바보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것을 개탄한다.
분노가 쌓여 있으면 같은 일을 두고도 칭찬하거나 불평하게 된다. 정직하고 겸손해야만 자신의 분노를 인정하게 된다. 자신의 분노를 솔직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인정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이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솔직하게 소개하고 스스로 자백하도록 해야 한다.
“저의 이름은 아무개입니다. 저는 화가 나 있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저의 분노를 합리화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뒤늦게 그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늙어가면서 자신이 탕자의 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사랑이 없어 공동체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은 저가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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