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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뭘 바라면서 봉헌해도 되나?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24 조회수780 추천수14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8주간 화요일 - 뭘 바라면서 봉헌해도 되나?

 


 

 

저는 기도를 권하면서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마음이 편안해지고 스트레스가 사라져 건강에도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어떻게 기도를 개인의 건강을 바라면서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어떤 개인적 이익을 위해 기도나 봉헌을 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잘못된 의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 정말 완전한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매우 칭찬하셨습니다. 곤궁한 와중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봉헌했다면 당장 무엇을 먹고 살아야할까요? 당연히 주님께서는 당신 섭리로 그 과부에게 합당한 보상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면서, ‘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 이것 봉헌하고 굶어죽어도 돼.’라고 생각했을까요? 저는 적어도 ‘주님께 받은 것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그리고 저의 삶도 주님께 맡깁니다.’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은근히 주님께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봉헌은 무조건적인 ‘감사’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실 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느님께 당신이 가진 전부를 봉헌하시는 것입니다. 그 봉헌 안에는,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해 주신 말씀처럼, 그 봉헌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먹이도록 아버지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는 ‘기대와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버렸는데 우리는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너 뭘 바라고 날 따라다니는 거냐?’라고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봉헌하는 것의 백배를 받는다고 하십니다. 만약 이런 희망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오천 명 앞에서 감사히 봉헌할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봉헌하는 모든 것은 백배의 보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믿고 계셨습니다.

만약 미사를 드리는 사제가 신자들이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되돌아오는 것을 매번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주님께 들어 올려 봉헌할 수 없을 것이고 만약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미사는 기계적으로 드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는 매번 주님께 제물을 봉헌할 때마다 그것이 생명의 빵과 음료로 돌려받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사랑이 희망하지 않고 희망하는 것을 믿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사랑이 되지 못합니다.

 

고 김남수 주교님은 어렸을 때 신부님이 집에 오시면 어머니께서 계란 프라이를 해서 드리는 것을 보시고 당신도 계란이 먹고 싶어 신학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물론 사제가 되는 것에 계란을 먹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바라게 하셨기에 그 분을 주교님까지 만들어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완전한 성소의 동기가 생기면 그 때 주님을 따르겠다고 한다면 제 때에 사제나 수도자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저도 사실은 처음에 신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게 된 동기가 ‘행복’ 때문이었습니다. 사제로 사는 것이 참 행복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기적인 동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남’을 행복하게 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이웃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랑해야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처음 동기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바랄 것은 바래야합니다. 그것을 바라면서 사제로 사는 것이 낫지 동기가 개인주의적인 것이니 옷을 벗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무언가를 희망하는 것은 믿음이 되고, 믿음은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됩니다. 물론 희망하는 것이 처음에는 이기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주님처럼 완전한 상태에서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십일조와 같은 것도 어쩌면 한 번 그런 희망을 하면서 시작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시험이라도 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불순한 동기로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아주 안하는 것보다 주님 말씀을 더 옳게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약탈할 수 있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약탈하면서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약탈하였습니까?’하고 말한다. 십일조와 예물이 아니냐!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 (말라 3, 8-10)

 
 
 
 

<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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