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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십자가는 높은 곳에 있지 않다 [생활 속의 십자가 인간]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26 조회수539 추천수2 반대(0) 신고
 
세상 인간 <과> 인간 세상
 
"인간의 구원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는" 분이시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예수님의 사랑, 곧 십자가의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인간은 자신에게 이해되지 못하는 존재로 남게 된다." (요한바오로2세 교황)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구원자"라고 왜 표현하는 것인지를 자신에게 다시 물어 보아야 한다. '세상의 구원자'라고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지만 세상은 인간 자신이 바로 이 세상을 살고있는 까닭이고 세상 보다도 인간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세상에 눈을 돌릴 때에는 그것이 달라진다. 인간 보다 세상이 먼저가 된다. 세상 안에 인간을 보려고 할 때, 인간을 바꾸고자 하는게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 안에서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세상 안에서 인간이 변한다고 주지할 때, 이미 인간은 세상의 지배를 받게 되어 인간 자신을 잃게 된다. 세상을 바꾸어야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게 '인간중심의 패러다임' (선악과 열매를 먹으면 인간은 하느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논리)이다. 세상이 바뀌어야 인간이 변한다는 '세상 논리'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에게는 진리가 아닌 가장된 거짓인 것이다.
 
'인간중심주의'가 변화되어야 참된 "인간의 구원" 진정한 "세상의 구원"이 인간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구원자" 곧,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는" 분이 되신 것이다. 새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인간 자신이 변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으로 변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지 않고 인간이 그리스도의 가르침(하느님의 지혜)을 따름으로 해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다스려 주시도록 인간 자신 안에 그분의 자리(하느님 중심)를 마련해 주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을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이같은 '구속신비'의 인간적 차원에서 인간은 인간 자신의 인간성에 깃들어 있는 본래의 존엄성과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세상적 인간과 다른 십자가의 인간, <참된 인간>의 새로운 중심점이다. 인간의 나약함, 죄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안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서 그 가치와 존엄성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리스도교의 출발이며 교회의 사명이 되기도 한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신비로운 '하느님의 사랑'(하느님의 정의)으로 인간을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진정한 인본주의'에 생기를 주셨다. 세상방식을 위해서 인간이 인간을 파괴 시키려는 자들로부터 '십자가의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구속의 신비,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의 세상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셨던 것이다. 십자가 하느님의 사랑이 아닌, '인간중심주의 사랑'에서는 인간은 인간에게 상처를 무수히 입히게 되며 인간은 인간에 의하여 하나의 '세상 부속품'으로 전락되어 지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든 인간들로부터 해방을 알리신 십자가의 인간, 곧 "인간의 구원자"가 되신 것이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갈라티아서 6, 14>
 
인간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고 세상에 그 목적을 둔다면 세상을 위해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 자체를 파괴하는 언행들을 계급적 계층적 투쟁논리 속에서 과감하게 전개한다. '그들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런 세상'에 살 수 있는 사람만이 적응하며 살 수 있게 될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소외되거나 또한 그들에게 새로운 속박의 지배를 받으며 또다른 억압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들이다. 그들에게서 사랑과 자비는 하나같이 '지배자'들의 논리로 치부되어진다. 만일 그들이 인간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고 세상에 그 목적을 둔다면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 되고 나더라도 역시 그들은 새로운 인간 지배자 (억압자)가 된다.
 
인간이 변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여전히 '세상 인간'으로부터 해방되어지지 못한다. 모름지기 '인간 세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세상의 청사진을 두고 있는 '세상 인간'이 아니라 어떤 인간의 청사진을 두고 있는 '인간 세상'인가 하는 점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자기 자신들에게 '세상에 대한 청사진'이 아니라, 올바른 '인간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가꾸어 갈 필요가 있다 하겠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사람' 곧 인간에게 제시되어진 '사람의 아들'이시다. '세상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사는 세상'이 되는 그런 '인간 세상'을 위해서 인간은 자신의 '인간 청사진'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인간의 청사진, 십자가의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화와 참된 생명의 십자가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며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세상이다. 세상이 하지 못하는 일은 세상 자체가 아니며 바로 인간 자기 자신이다.  /  2009-09-09 오전 10: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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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숨결 <과> 사랑의 판단

하느님은 사람에게 고통을 불어 넣어 주신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이기는 하느님 당신의 '사랑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고통이시기에 - 고통과 죽음을 이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에 - 고통과 죽음을 온전히 이기시는 것입니다. 영혼이여, 그대가 만일 사랑의 보화를 얻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몸에 받으신 고통만 묵상하지 말고 그 성심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지극하시고 무한하신 예수성심의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도 그분의 부족한 남은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고통이 아직 남아 있기에 그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원죄로 인한 사람의 고통으로 부터 동참(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을 향한 지극하시고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고통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람에게 아직 남아 있는 고통, 모든 피조물의 신음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은그리스도처럼 [ 사람의 고통에, 인간이 동참한다 ]는 것입니다. 사람의 남아 있는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면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신 사랑의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처럼 [ 사람의 남아 있는 고통에 사람이 사랑으로 동참하는 것 ]을 말합니다.

"가장 보잘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해 준 것과 같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 사람 안에 오시어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사람 안에서 '당신의 그대로' 행할 때에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처럼 고난과 고통이 따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하게 됩니다.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람을 사랑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게 됩니다. 예수성심은 인간 차원의 고통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십자가의 사랑)의 차원입니다. "사랑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입니다 <2007년 2월>

악이 발생했습니다. 이 악을 제압하기 위해 다른 악이 작용한다면 처음의 악은 나중의 다른 악에게 제압이 된다 하여도 여전히 나중의 다른 악은 남습니다. 오히려 악을 제압하는 명분으로 말미암아 나중의 악은 처음의 악 보다 더 발전된 악으로 변하여 질 것입니다. 이것은 악이 지상과 인간 안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이 땅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온갖 모든 악의 근원 자체를 뿌리 뽑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으로 악을 뿌리 뽑으신게 아닙니다. 사랑으로 그러하셨습니다. 악을 악으로 제압하면 악이 또 다시 뿌리를 내리는 것과는 달리 사랑으로 나중의 악이 뿌리 내리지 못하게 하였으며 처음의 악이 사랑으로 또한 변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세상 정의)에서 오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1요한서 3, 8> 
 
악에 대하여 '인간적 앙심'을 가지고 새로운 악을 창출해 내는게 아닙니다. '앙심'은 사랑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악마의 작용입니다. 멸시와 미움 속에서 상처를 남기는 채찍을 받더라로 악에 대하여 악으로써 대응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내하며 극복합니다.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거창하고 인간이 차마 도달할 수 없는 저 높은 곳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그와 반대로 아주 낮은 곳에 있으며 인간의 생활과 동떨어지지 않았고 바로 인간 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는 '자기 버림' 곧 '자기 내어줌' 입니다.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기에 '십자가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내어 준다라는 것은 십자가의 희생제사인 성체성사적 삶을 의미합니다. 자기 희생을 뜻합니다만 자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현실과 격리된 차원이 아니라, 세상 현실 안에서 진리를 포기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자신의 작은 사랑과 나눔의 빵의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가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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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주는 인간의 행위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요한복음서 3, 31 - 36>
 
땅에 속한 사람은 '편리한 세상'의 생각을 합니다. 땅에서 난 육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은 '위'의 생각을 합니다. '위'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에서 오는게 아니라 '위'에서 내려 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는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오십시오, 주 예수님") '아버지의 나라' 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복음서> 하십니다. 입과 머리로 하느님 나라를 보는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영(위)에서 태어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의 의로움'으로 십자가 세상이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이 부활하지 않고 인간의 편리한 방식이 설치게 되면 고통을 주는 인간의 행위 날뛰게 되며 사랑은 식어 사람들의 마음은 반목과 상처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사는 땅에는 평화와 생명을 찾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율법주의자, 바리사이들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짓밟히고 맙니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십자가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 할 것입니다.
 
* 십자가의 자녀 * ("여인의 남은 후손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서, 요한묵시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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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난 사람은 땅(육)에 속하고
    땅(육)에 속한 것을 말한다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 =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의 모습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1코린토서 15, 47 - 49>
 
 
 
고통이 없는 사랑 (십자가 없는 예수님)
사랑이 없는 고통 (예수님 없는 십자가)
 
하느님의 뜻(사랑)을 따라서 겪는 상심(고통)은 회개할 마음을 일으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을 후회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속적인 상심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2 코린토서 7, 10>
 
 
 
 
당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당신(아드님)께 순종 =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의 순종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피서 2, 5 - 8>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 <히브리서 5, 8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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