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5월 31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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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10-05-31 | 조회수783 | 추천수19 | 반대(0) 신고 |
5월 31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루카 1,39-56
“마리아는 석 달 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새벽별 성모님>
매주일 미사에서 합송하는 사도신경 때 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서 잉태되어 나시고’라는 부분에서 머리를 숙입니다.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졌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무조건 수용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강생하심, 이는 너무나 심오한 신비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성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인간의 언어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육화강생’이란 너무나 큰 신비 앞에 열심히 이론적으로 연구했습니다. 증명해보려고 기를 썼습니다. 결국 지쳐 떨어졌습니다. 최종적으로 자신들의 코 앞으로 다가온 하느님과 그분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구원이라는 귀중한 선물을 뿌리쳤습니다.
하느님은, 육화강생의 신비는, 신앙은 연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증명의 대상도 아닙니다. 추론의 대상도 아닙니다.
열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렁찬 응답이 필요합니다. 충실한 따름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언젠가 반드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리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의 나날이 힘겨워도 언젠가 반드시 하느님께서 좋은 날을 허락하시리라는 낙관주의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앞에 나이 많은 사람들, 경험 많은 사람들, 재산 많은 사람들, 가방끈이 길었던 사람들,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 큰 인물들은 대체로 이 엄청난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대단해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장해물이 된 것입니다.
반대로 성모님을 보십시오. 어린 시골처녀였습니다. 맑았습니다. 진지했습니다. 순박했습니다. 단순했습니다. 순수했습니다.
엄청난 초대였지만, 있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앞 뒤 따지지 않고 그냥 대답했습니다. 한 평생 충실히 하느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구원의 기쁨을 만끽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순수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단순해지셔야 합니다. 맑아지셔야 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이해의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정복의 대상도 아닙니다. 학문의 대상도 아닙니다.
승복의 대상입니다. 경탄의 대상입니다. 찬미의 대상입니다. 관상의 대상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몸을 통한 구세주의 육화강생이란 너무나 엄청난 사실 앞에 그저 침묵하셨습니다. 한 평생 간직하셨습니다. 예수님이란 해와 같은 존재가 점점 밝아지도록 서서히 자신을 감춘 새벽별 같은 존재가 성모님이셨습니다.
기존의 랍비들은 말들이 많았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신학에 대해서 다들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말싸움의 대가들이었습니다. 입을 한번 열었다 하면 몇 시간이고 이야기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침묵의 스승이셨습니다. 놀라운 하느님의 신비와 사랑 앞에서 늘 고개 숙이며 그렇게 기도하며 살아가셨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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