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괴 성모님 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찬미예수님
한주일 동안 편안하셨죠?
오늘도 미사시간에 비록 짧은 강론이라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제의 입술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큰 축복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사제의 입을 통해서 축복의 말이 나올 때마다 신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어떤 말을 해야 될까?
성서에 가장 아름다운 말이 성모님의 입을 통해 나왔죠?
그 말이 뭡니까?
천사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즉시 뭐라 그럽니까?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그 말씀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때 천사는 떠나갔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그 말씀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말만큼 성서에서 아름다운 말은 없습니다.
‘그 말씀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는 이 말을 우리가 단 두 마디로
‘아멘!’ 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멘!’이라고 하는 말뜻이 ‘예, 신부님을 통해서 저에게 온 그 말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그 말입니다.
근데 우리 신자들 제가 피정 때라든지 미사 때라든지 강론을 하면 어떤 때는 그 아멘소리가 우리가 합창이 되듯이 하느님께 올라가야 되는데 그냥 가만히 있는 신자들이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죠.
개신교신자들은 목회자들의 설교 이렇게 딱 끝나면 아주 뜨겁게 아멘하죠?
그런데 오히려 천주교 신자들이 신부님 강론 들으면서 옆에 사람이 아멘하면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이 쳐다봐요.
‘저거 왜 저래? 뭐 잘못 먹었나?’
잘못 먹긴 뭐 지가 잘못 먹었지? 뭐 남보고 잘못 먹었대?
강론이 다 끝나면 어느 신부님이든지 다 ‘아멘!’하고 끝이 납니다.
신자들도 따라서
‘아멘!’
하고서는
‘네, 오늘 신부님을 통해서 저에게 오신 말씀 제가 제안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사제의 축복의 말씀은 신자들이 ‘예,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는 말이 됐을 때 비로소 이렇게 뭐가 맞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만 입을 벌려라. 채워 주리라.’그랬어요.
입 다물고 있을 때는 아무리 좋은 말을 사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들려주신다 하더래도
성서에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성모님의 말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그 말씀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린 이렇게 긴말 할 필요 없습니다.
‘아멘’ 단 두 글자만 외쳐도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기도는 ‘아멘!’입니다.
성서를 읽다가 아니면은 차를 타고 가면서 어느 신부님의 테이프를 듣다가
‘아~ 저건 내말이다.’ 그러면 ‘아멘!’
‘그 말씀이 제안에서 그대로 싹이 나서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뜻일 겁니다.
‘아멘!’을 많이 하는 사람은 천국 갑니다.
‘아멘!’
아이구 착해라.^^
‘아멘!’하는데 인색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며칠 전 우리 여기 대림피정 할 때도 피정시키는 회장님이 오셔tj
‘아멘!’하는 것도 가르쳐줬죠?
아멘 좀 하십시오. 그만큼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아멘을 안 해요.
성모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인데도 성모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해야죠?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믿습니다.’
‘아멘!’
아멘을 많이 하십시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아멘!’ 그러면 천국 가는 계단이 하나씩 만들어집니다.
사제들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죠?
아시죠?
저는 이제 이십오 년을 사제생활을 하다보니까 많은 사람을 만났고
아마 다른 신부님들보다도 참 다양하게 많은 사목적 경험이 있다 보니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것 같습니다.
교도소 사목을 몇 년을 하다보니까 조폭 중에는 제 동생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교도소에 있을 때 조폭으로 들어온 사람들, 그 사람들은 신부도 무조건
‘형님’그 럽니다.
지 맘에만 맞으면 ‘형님 오늘부터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모셔라.’ 그래 조폭가운데 지금도 내 동생들이, 아우들이 있어요.
그래 여러분들 저한테 까불지 마십시오.
우리 조직한번 동원하면 무섭습니다.^^
그런데 조폭생활을 하다가 이제 정말 찰 신자가 되기 위해서, 회개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아우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어느 날 미사에 와서 “신부님, 제가 요즘 성서를 좀 공부하고 있는데 참 황당무계한 얘기도 많이 나옵디다. 그런데 아무튼 다른 건 다 내가 신앙으로 받아들이겠는데 신약성서를 읽다가 ‘요셉’ 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서 참 이해가 안갑니다. 첫 번째로 약혼한 자기 약혼녀가 자기씨도 아닌데 남의 씨를 받아서 배가 불러오고 있을 때 그걸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물론 성서에는 천사가 나타나서 ‘두려워하지 마라. 받아들여라.’하는 말이 있지만 천사가 나타나기 전에 그 얼마나 갈들이 심했을까요? 약혼녀가 잉태한 것이 드러났을 때 그 배우자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두 번째 제가 절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평생 동정부부로 살았다 그러는데 신부님이 만일에 그런 입장이라면 그 여자 그냥 내버려뒀겠습니까? 어떻게 한방에 살면서 어떻게 안건드릴 수가 있습니까?”
조폭스럽게 저한테 얘길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랬죠. 나는 결코 한방에서 딴 여자랑 살 입장이 절대 안 되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으니까 내 걱정하지 말고 너는 만일에 그런 경우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동정을 지킬 수 있겠느냐?”
“아이고 저는 끝장 봅니다. 가만 안 놔두죠."
이 남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남자들은 서로가 동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힘들 겁니다. 물론 요즘은 딴방 쓰는 부부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뭐 무관심의 상태로.......
그래서 그 형제 얘기로 ‘이 요셉성인은 분명히 바보입니다. 요셉은 분명히 내가볼 때 바보가 아니고 뭐가 좀 나사가 풀리지 않았는 경우면 어떻게 이렇게 살수가 있겠느냐?’
어찌 성서에 바보가 요셉뿐이겠습니까?
바보 중에서 제일 우두머리가 누구죠?
예수님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사람은 바보들만 잔뜩 모여 있죠.
그래서 성서는 뭐냐?
바보들의 총집합체입니다.
바보들이 총집합하는 책이 바로 성서책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크리스찬의 영성의 시작은 바보가 되는 거로부터 시작이 돼야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셔야죠.
‘아~멘!’
뭐가 돼는 거로부터 시작이 돼야 된다구요?
<바~보>
바보가 되는 거로부터 시작이 된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저렇게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쳔의 영성은 분명히 바보가 되는 거로부터 시작이 돼야 됩니다.
신학박사 학위를 몇 개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보다 더 똑똑한 척 하면 그 사람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바보들만 모여 있는 성당은 날로 날로 성화가 됩니다.
그러나 지 잘난척하는 똑똑한 인간들만 드글드글하는 성당에 가보면 파들만 수십 개의 파로 갈라져있습니다.
뭐 누구파, 누구파, 다 끼리끼리 모여서 남 험담하고 모이면 비판하고 그걸로 한세월 다 지나갑니다.
다 예수님보다 잘난 인간들만 드글드글대는 성당은 비록 그 성당, 60억 70억짜리 으리으리한 대리석으로 지은 성당이라 하더라도 썩은 냄새만 풀풀 납니다.
바보들만 모여 있는 성당은 성화가 됩니다.
그러나 요즘은 본당에서 바보보기가 참 귀합니다.
어찌 그렇게 다 똑똑하고 머리들을 잘 굴리고 사는지 다 예수님보다 지능이 높고 다 똑똑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당이 깨지고 냉담자가 오십 프로가 넘어가는 이유가 다 그런 것이 아닐까?
‘상처받아서 못나오겠습니다. 저 인간 보기 싫어서 나 못나오겠습니다. 딴 본당 가겠습니다.’
액션단체에도 똑똑한 인간들 둘 셋만 부딪치기 시작하면 그 액션단체는 깨져나갑니다.
뭔가 잘되던 액션 단체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본당에서 활동을 할 때도 되지도 않고
"이거 왜이래?" 하고 물어보면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갈등이 있는 겁니다.
자존심 싸움하고 있는 겁니다.
반구역모임도, 잘되던 반구역모임도 똑똑한 인간 하나만 들어와서 휘젓기 시작하면
다 떨어져나가고 반모임 구역모임이 다 깨져버리고 맙니다.
레지오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세사에 큰 역할을 한 많은 분들이 있지요?
아브라함, 모세, 성모님, 요셉.....
하나같이 인간의 기준으로, 세속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바보짓만 하다가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약성서에 보면 요셉의 이야기가 세 번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가 첫 번째요.
호적 파러 유다지방에 가셨을 때 두 번째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 번째는 성탄 직후에 헤로데의 손을 피해서 에집트로 갔을 때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은 바보는 바보지만 그 앞에 어떤 말이 붙느냐!
지혜로운 바보입니다.
천국을 향하는 바보입니다.
똑똑한 바보입니다.
이 지혜로운 바보, 요셉은 세 가지의 뛰어난 덕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셉은 첫째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혜로운 바보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까 어느 조폭 형제가
어떻게 한 집에 살면서 동정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합니다.
인간의 욕망과 욕정과 영성생활은 기도생활과 반비례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생활이 깊어지면 사실은 성욕은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들이 살아가는 겁니다.
사제들도 기도 안하면... 사제들도 인간인데 왜 성욕이 없겠습니까?
왜 욕정이 안 생깁니까?
사제들도 애욕칠정 다 가지고 삽니다.
사제들도 기도생활이 빠지면 세속적으로 욕정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에도 전주에 가보면 루갈다 동정 부부 묘지에 가보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고을과 저 고을에 두 처녀 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천주님을 일찍 알고 한평생 동정으로
살아가기를 원했지만 그 당시 시대풍습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하던 첫날밤에 서로가 마음을 드러내 보이면서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이미 하느님과 동정을 지키면서 살아가기로 약속했소.”
부인 루갈다도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 한평생 기도하면서 동정부부로 살아갑시다.”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인간의 본능이 있지요.
살 냄새가 나고, 인간의 냄새가 나고, 여자 냄새가 나고, 남자 냄새가 나는데...
그게 쉽게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욕정이 일어나면 남편은 뛰어나가 찬 우물에 샤워를 하고 정신을 차리고...
루갈다에게 또 욕정이 일어나면 그야말로 바늘로 찔러가면서도
두 부부는 동정부부로 살다가 순교를 했습니다.
교우들 가운데 보면 사순절 때가 되면 금욕생활을 하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사순 재의 수요일이 되면 “오늘부터 부활절까지는 우리 금욕생활을 합시다
그걸 이기기 위해서 우리 같이 저녁마다 기도해야 됩니다.”
묵주를 들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갑자기 음욕이 확 못 견디게 일어나요.
기도하는 그 부인의 옆모습을 니까 더 충동이 일어나는 거예요.
묵주를 들고 기도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은총이 가득하신 환장하겄네...환장하겄네...’
자기는 처음에 뭔 말을 하는지도 몰랐는데 부인이 옆에서 들어보니까
‘은총이...환장하겄네, 환장하겄네.....’
그 부부는 사순절만 되면 칼같이 금욕생활을 하면서 그 희생을 봉헌했다고 합니다.
가능합니다. 그렇게 사는 부부들도 실제로 있습니다.
요셉은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본능을 초월해서 성모님을
동정녀로 사시게끔 지켜 주실 수가 있었던 겁니다.
불가능한 얘기가 아닙니다.
사제들은 바로 그런 모습을 이 세상을 살면서 보여줍니다.
사제들이 독신을 지키는 자체가 하느님을 강하게 증명하는 겁니다.
사제의 독신제도가 바로 하느님을 강하게 증명하는 표시입니다.
무슨 힘이 저 사람을 저렇게 혼자 살게 할까!
야, 멀쩡한데 왜 혼자 살까!
무슨 힘이 저 사람을 혼자 살게 할까!
뭐가 있긴 있어....뭐가 있긴 있나 봐!
혼자 사는 걸 보니까 저게 사람이 힘으로 될 게 아닌데....
뭔가 아무튼 큰 힘이 있긴 있어.
다시 말하면 사제의 독신제는 사람들의 마음에다
‘? ’ 마크를 찍어줍니다.
뭐로 하여금 저 분이 저렇게 살게 할까!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지혜로운 바보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지혜로운 바보는 오늘 요셉처럼 신중하고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자기 약혼녀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첫 번째 따라오는 감정은 복수심입니다.... 증오입니다.
‘니가 나를 배신하고 이럴 수가 있어!’
그러나 요셉은 신중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뭔가 사연이 있을 거다...저 여자가 저런 여자가 아닐 거다!’
그래서 그 분노를 복수심을 참고 기다렸더니 천사가 나타나서
“두려워 말라!”
사실 요셉은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내 약혼녀가 잉태한 것이 드러났는데
만일 “저 씨는 내 씨가 아니오!”
이 말 한 마디만 하면 마리아는 머리채 그냥 잡혀 동네 한 가운데 나와서
동네사람들이 돌로 때려 죽여도 친정부모도 말릴 수가 없는
유대인의 3대 범죄 가운데 하나인 간음죄로 죽을 형편이었습니다.
죽을 때 성모님만 죽습니까?
누가 같이 죽어야 됩니까?
태중에 예수님도 같이 죽여야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신중했습니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마리아가 그런 여자가 아니다!’
두렵고, 불안하고, 그 분노에 잠을 못 이루고 있을 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두려워 말라!’ 요셉에게 한 첫마디가
“두려워 말라, 마리아의 태중에 아기는 성령의 힘으로 잉태된 것이니
앞으로 니가 지켜주고 보호해야 한다!”
요셉은 구원의 역사에 세 번 밖에 등장을 하지 않지만
요셉이 없었다면 구세주가 이 세상에 나오실 수 있었을까!
요셉은 신중하고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여자의 아름다움이 세 가지가 있다고 그럽니다.
여자가 언제 아름다울까요?
우리 마리아 수녀님 대답해 보세요...여자가 언제 아름다워요?
밥 많이 먹을 때?
여자의 아름다움이 세 가지인데 첫 번째가 미소 지을 때
뭐라구요?
미소 지을 때....
웃는 여자가 예뻐요... 맨날 주둥아리는 2m 튀어나와가지고...
부어터져 있는 여자들 보면.....참
두 번째, 기도하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세 번째, 젖먹이는 여자가 아름답대요.
여자들 젖먹일 때 참 아름답지요.
그런데 이 여자를 아름답게 만들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뭐냐!
남자의 너그러움이에요. 남자의 신중함이예요.
밴댕이 콧구녕 같은 속아지를 갖고 있는 남편 밑에 있는 여자얼굴이 미소가 나올 수가 없고,
얼굴에 기쁨이 생길수가 없지요.
그래서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띄게 하는 것은 남자의 너그러움과 신중함이지요.
그럴 때 부인의 얼굴이 밝고 부인의 얼굴이 밝으면 자동적으로
자식들이 정서적으로 안정이 됩니다.
엄마가 흔들리고 엄마가 허구한 날 징징 짜고...
분노의 얼굴이 보일 때는 자식들은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하지만
아내라고 하는 말이 뭡니까?
‘집안에 떠 있는 해다.’ 그 뜻이지요!
집안의 떠있는 해인 엄마의 얼굴이 아내의 얼굴이 밝고 평화로울 때는
갓난아기조차도 엄마의 그것을 느끼고 체험한다고 그럽니다.
요셉성인처럼 매사에 너그럽고 신중하십시오.
내 아내의 얼굴에 기쁨을 주는 것은 절대적으로 남자한테 영향이 큽니다.
아름다운 내 아내를 만들고, 아름다운 내 딸을 만들 때는
반드시 남자의 너그러움과 신중함이 필요하다는 것, 명심하십시오.
세 번째로 요셉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겸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성요셉이 꿈에서 어렴풋이 본 것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생시에 생생하게 듣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아니예요?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신 성서의 말씀을 직접 보고
사제의 입술을 통해서 듣는데 비해서
성요셉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무관심하게 지나쳐버리지는 않는가!
심지어는 사소한 이익을 얻기 위해 하느님을 배신하기를 밥 먹듯이 합니다.
성요셉의 태도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자기 자신의 계산방법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요셉은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모두가 주님의 사업이라는 것을 깨닫고
비록 손해 보는 일이 있더라도 감사히 인내하면서
일상생활 안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이도록 애쓰십시오.
성모님과 예수님을 뜻을 목숨 바쳐 지켰듯이 우리도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바보가 되도록 합시다.
예수님을 목숨 바쳐 지킨 요셉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이 뭔지 압니까?
오늘날 성요셉은 뭐하는 이의 주보성이십니까?
임종하는 이의 주보성인입니다.
그리고 요셉성인에게 가장 큰 축복은 뭐냐!
예수님이 요셉의 임종자리를 지켰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직접 그 옆에서 요셉의 마지막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는
그런 축복, 은혜를 누릴 수 있었던 겁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살면서 예수님을 지키려고 하고
거룩한 바보가 되려고 노력할 때는 우리들에게
언제 어느 때 임종의 순간이 오더라도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심을 믿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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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가 238번> 자모신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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