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삼위일체 하느님" - 5.30,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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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0-05-31 | 조회수412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5.30 주일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 생명의 날) 잠언8,22-31 로마5,1-5 요한16,12-15
"삼위일체 하느님"
성모성월, 제일 좋은 시절 5월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삼위일체대축일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자신을 활짝 계시한 날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믿음, 희망, 사랑은 무슨 색깔일까요? 십중팔구 성모성월 5월의 생명으로 빛나는 신록의 색깔일 것입니다. 하느님 생명의 빛 가득한 신록의 세상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하느님 사랑에 촉촉이 젖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별난 하느님 체험이 아니라 이렇게 아름다운 신록의 세상 안에 살고 있음이 그대로 살아계신 하느님 체험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우리 수도승들의 하느님 찬미입니다.
“온 세상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온 누리여 주님께 찬미의 노래 드려라.”
화석화된 죽은 삼위일체 교리의 하느님이 아니라, 온 누리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다는 체험적 고백이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개방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으로 활짝 자신을 개방하신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입니다. 온 누리, 누구나 깨달아 알 수 있도록 각자의 성향이나 눈높이에 맞춰 성부로, 성자로, 성령으로 개방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각자의 성향이나 눈높이에 따라 성부 하느님을 만나든, 성자 하느님을 만나든, 성령 하느님을 만나든 결국 같은 하느님입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모든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개방은 그대로 사랑의 표현이자 전능의 표현입니다. 사랑할 때 개방합니다. 사랑만이 두려움을 몰아내 개방하게 합니다. 자연의 이치나 사람의 이치나 똑같습니다. 태양을 향해 활짝 피어나는 꽃들, 사랑하는 이를 향한 활짝 열린 마음들, 그대로 사랑은 개방임을 보여줍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자신을 남김없이 활짝 개방하여 누구나 당신 사랑을 맛보며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성자 그리스도는 그대로 하느님 개방의 절정입니다. 제1독서 잠언에서 소개되는 하느님의 지혜는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누구나 보고 알 수 있도록 당신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를 개방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그대로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세상에서 하느님 개방의 선물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성자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듯 그리스도를 닮은 우리들 역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역시 하느님 사랑의 표현들이요, 하느님 사랑을 환히 드러내는 것 바로 이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궁극 목표입니다. 마음의 눈만 활짝 열리면 당신이 선물하신 세상의 모든 것들을 통해 자기를 활짝 개방하신 사랑의 하느님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빛나는 온 세상을 볼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소통입니다. 통해야 사람도 살고 자연도 삽니다. 하여 흐르는 생명의 강을 가두어 불통케 하는, 운하사업의 전단계로 의심받고 있는 4대강 사업은 무조건 중단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화두는 두말 할 것 없이 소통입니다. 그만큼 불통의 사회임을 웅변합니다. 모든 병들은 한 결 같이 불통에서 기인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 막힘없는 소통을 상징합니다. 소통은 생명이요 힘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은, 힘은 바로 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원활한 소통에서 솟아납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소통이 원활해야 활력 넘치는 삶입니다. 소통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 안에서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삶입니다. 다음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이를 웅변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은총 속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소통, 이웃과의 소통의 중심에 계신 성자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소통은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누리는 평화요, 하느님 은총의 삶이요,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이요, 하느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입니다. 이래서 성전 제대 뒷면 중앙에, 방마다 걸려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위로 하느님과의 수직적 소통이, 좌우사방으로 형제들과의 수평적 소통이 원활해야 충만한 삶이기에 우리 삶의,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 소통의 상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일치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할 수는 있어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실재인 하느님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성부라 부르기도 하고 성자라 부르기도 하고 성령으로 부릅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말씀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진리의 영께서 우리 모두에게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바로 사도 요한처럼 이런 살아계신 주님의 체험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은연중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 성령이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결국 한분 사랑의 하느님이듯 세상 모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닷물로 나뉘어져있는 섬들이 따로 인 듯이 보이지만 물 속 깊이에서는 하나로 땅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또 제대 보 한 쪽을 잡아당기면 전체 제대보가 끌려오듯이 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의 한 사랑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우리의 복된 운명입니다. 다 다른 사람인 듯 보이지만 뿌리를 거슬러 가면 하느님 하나의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여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공종공생, 공존공락의 길은 이 이중 계명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존재한다는 자체로 누구나 사랑받고 존중 받아야 할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온 누리에 충만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성부 하느님은 성자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성령 안에서 끊임없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십니다. 하느님은 만물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 한 분 하느님 성부께서는 만물위에 계시고 성자께서는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성령께서는 만물 안에 계시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입니다. 분리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랑은 개방입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에 개방할 때 살지만, 폐쇄로 닫아 버릴 때 죽습니다.
사랑은 소통입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위로 하느님과 옆으로 이웃과 소통할 때 살지만 불통일 때는 죽습니다.
사랑은 일치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일치를 이룰 때 살지만, 분열로 고립 단절되면 죽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 사랑으로 서로 개방하고 소통하고 일치할 때 진선미,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말 그대로 하느님을 닮은 삶이요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 은총의 사랑으로 우리를 활짝 개방시켜 주시고, 소통케 하시며 일치를 이루어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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