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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당신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하시고! [허윤석신부님]
작성자이순정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31 조회수490 추천수5 반대(0) 신고
 
 
 

5월 성모성월의 마지막날인 오늘은 바로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방문축일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아룀을 순명과 믿음으로 즉시 받아들이고 성령에 인도로 친척엘리사벳을 방문하게 됩니다.

 

 

마리아가 2000년전 오늘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는그 사건안에서의 의미와 은총은 그것으로 끝난것이 아니라

 

오늘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역시 엘리사벳과 같이 우리를 방문하시는 성모님을 만나야 됩니다.

 

 

저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며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스바니야 예언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임금이신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 사랑으로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시온의 백성인

 

당신의 아들딸들을 보호해 주시며 회복하게 해주실것임을  다음과 같이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 임금 주께서는 네 한가운데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주 너희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시온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수도이자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시온은 바로 하느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시온은 늘 다른 민족들에게 정복되고 지금도 분열과 전쟁의 근원지가 되었습니다.

 

 

어둠속에 빛이 비추이듯 하느님은 시온의 성에서 당신 구원의 말씀을 어둠속에 있는 백성에게 선포하십시다.

 

 

시온은 또한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우리자신을 말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았지만 세상살이와 이기적인 본성을 가진 나약한 인간이 우리는 정말 오늘의 시온성입니다.

 

하지만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임금으로 우리가운데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마라!는 말씀을 시온의 백성에게 오늘도 하십니다.

 

 

처녀인 마리아를 찾아가 천사 가브리엘이 한 말 역시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 너는 은총을 입었다."입니다.

 

 

우리가 매일 성모송을 바치면서 이러한 의미

 

즉 두려움과 어둠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살이의 순간에 그 두려움을 물리쳐주시고

 

은총을 베푸시는 분은 우리가운데 살아숨쉬시는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모송의 기도문 전반부의 천사의 아룀은

 

 2000년전 마리아의 집에서 한 처녀에게만 하였던  단순한 천사의 칭송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자리에서 모든 이들에게 선포되는 하느님 사랑의 계약의

 

성실성과 권능을 선포하는 기쁜 순간을 의미합니다

 

.

 

저는 오늘  제 1독서의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다음의 말씀이 행복하고 은혜로웠습니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당신의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주신다는 이말씀은 참으로 행복하면서도 다행스러운 말씀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기에 거룩한 사랑의 책이며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긴 책을 복음 즉 복된 말씀 은총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사랑은 너무나 인간의 배신과 질투 나약함 때문에 늘 위태합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가장 실수하신 것은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마져 듭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죄부터 카인과 아벨의 살인죄! 등 성서에서 많은 부분

 

하느님의 선물로 주신 양심과 맑은 영혼을 더럽히는 유혹에 넘어가 세상을 악으로 물드리게 하는 사건들을

 

바라보지만 하느님은 늘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고

 

 급기야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죄이외에는 모든 것을 우리와 같게 하시며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겸손된 응답과 순명안에서 낳게 하시어 세상을 구원하는

 

십자가상의 제사를 수행하도록 하셨습니다.

 

 

 

한국말 성서에는 신약과 구약의 모든 사랑이 모두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나오지만

 

원문성서에 보면 여러가지 단어를 씁니다.

 

 

성서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말할때는 반드시 계약적 사랑을 지칭하는 헷셑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헷셑은 계약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는 계약하면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못믿어울때 계약이나 공증을 합니다.

 

계약은 상거래나 하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계약이라는 의미는 참으로 성서안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하느님께 다른 동물이나 식물보다 사랑을 받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받을 이유는 더우기 어디에 어떤 형식으로 갖추어 져있을까요?

 

우린 왜 우리가 기도하고 하느님께 빌면 그분이 들어주셔야한다고 생각할까요?

 

우린 정말 영원히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집을 영구 임대하듯이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그것을 계약으로 영원히 하셨습니다.

 

 

자유인대 자유인으로서 말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계약적인 사랑이란 자유인의 책임있는 사랑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모두 자유를 누리지만 신분이 구별되는 사회였던 때에는

 

오직 자유인 만이 자신의 권리와 책임을 가졌습니다.

 

 

계약은 두 당사자가 그 계약의 조건을 걸고 그 담보물이나 보증물내지는 보증인을 내세움입니다.

 

그리고 계약기간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즉 하느님의 사랑의 계약기간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영원하기에 그 사랑을 누릴 사랑의 계약자이며

 

 대상인 우리역시 영원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약의 담보물로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한 당신 사랑의 증거자로 당신자신을 세우셨습니다.

 

 즉 성서에 표현하듯히 당신은 성실하신 분입니다.

 

계약의 보증은 자신보다더 권위있는 직위의 사람이나 재산을 걸어야 합니다.

 

하느님보다 더 권위와 부유한 존재는 없기에 당신은 당신자신을 걸었던 것입니다.

 

성실하신 당신의 사랑의 실천력을 바탕으로 한 당신의 사랑!

 

바로 이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하시리라!는 이말씀은

 

너무나 행복감으로 심장이 터질것 같고 죄송스러운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몰입된 사랑을 주십니다.

 

 

그분은 너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라고 예언자는 말합니다.

 

 

사랑이 깊은면 그렇습니다. 제가 해보니까 그렇습니다.

 

 

나때문이 아니라 너때문에 환성을 올리고 기뻐하게 되는 때가 바로 사랑이 몰립된때입니다.

 

하늘과 같이 넓고 바다와 같이 깊은 하느님 사랑이 좁고 비천하고 어두운 나라는 존재에 모두 담겨지는

 

 이신비를 우린 참으로 깨닫지는 못해도 행복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분은 당신의 사랑의 기분을 "축제인양 그렇게 하시리라!"라고 표현합니다.

 

 

정말 사랑은 열심히 쏟아 붓는 쪽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모르는 쪽이 있나봅니다.

 

 

하느님은 늘 축제인양 그렇게 사랑을 베푸시고 기뻐하시는데

 

신앙인인 우리는 얼마나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하고 봉사할때

 

그리고 삶을 살아갈때 우리의 삶이 축제인양 그렇게 기쁘게 할까요?

 

 

 

이제 오늘복음을 함께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마음과 성모님의 마음을 살펴봅시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모습은 복음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서둘러"였습니다.

 

 

임신한 몸으로 왜 서둘러 방문을 하였을까요?

 

 

그것은 발 성모님의 영성을 의미합니다.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동기는 천사의 말에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그러한 일이 있을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천사는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가진지 3달이나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다.

 

 

즉 천사의 이러한 설명에서 우리는 커다란 교훈을 얻습니다.

 

 

성모님이 무작정 아무 생각없이 무조건 당신의 뜻을 동의하는 것은 하느님은 바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천사의 말을 통해 친척이며 이웃인 엘리사벳의 세자 성요한의 임신사건을 표징으로 보여주십니다.

 

 

마리아는 친척엘리사벳의 임신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된것임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역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어렵거나

 

 우리가 혼돈과 유혹 내지는 순명하기 어려울때

 

우리 주위에 있는 표징들 우리 이웃에서 하느님이 베푸신 기적과 은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힘들때 성서의 사건과 인물들을 바라보면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사건을 통해 힘을 얻은것 처럼

 

힘을 얻어 서둘러 그를 찾아가 그와 기도하고 하느님을 찬양할수 있는 것 처럼

 

성인성녀들도 나홀로 성인성녀가 된것이 아니라 선배성인성녀들과 그처럼 하나되고 도움받아 된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보성인을 우리의 세례명으로 정하고 그들의 삶을 늘 모범으로 삼는것입니다.

 

 

마리아의 "서둘러" 방문은

 

바로 지체없는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대한 그녀의 믿음을 동작으로 보여준것입니다.

 

 

 그리고 서둘러 자신이 온전히 응답할수 있게 힘과 표징이된

 

 엘리사벳과 그의 아들 요한을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서의 내용을 잘알지 못하고 성인성녀들의 글과 생애를 모른다면

 

그냥 세례만 받고 주일미사만 겨우 참석한다면...

 

 

우리는 결국 고통과 고독의 순간이 오면 엘리사벳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고

 

내가 처녀인데 아이를 낳는다면 오해해서 날 죽일거야하는 인간적인 나약함에 빠질것입니다.

 

 

사람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듣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이 그렇게 다르게 판단되어지고 말해지는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사랑으로 살기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사건을 통해 물론 자신과 똑같은 사건이 아니지만

 

엘리사벳의 잉태를 보고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능력을 믿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하나의 교훈을 발견합니다.

 

 

 우리역시 마리아처럼 내가 아닌 우리에게 베푸신 기적과 은총이 나에게도 함께 내리고 있고

 

나역시 그러한 은총을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져야한나는 것입니다.

 

 

 

은총에 있어서 나와 너가 구분되고 그것이 질투심이나 동경이된다면

 

그것은 유혹이며 가장 치명적인 영혼의 독입니다.

 

 

기도문에서 늘 하느님께 우리라는 말을 씁니다.

 

 

 

하느님 역시 우리모습을 닮은 인간을 만들자라고 했습니다.

 

 

 

마니피갓에서 오늘 성모님은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라고 합니다.

 

 

 그 자비는 헤셑을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의 계약적인 사랑입니다.

 

 

그사랑은 영원하기에 우리조상에게 말씀하신대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영원히 미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을 무조건적으로 야훼이레

 

즉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다는 정신으로 봉헌한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늦둥이 외아들을 다시 봉헌하라는 말씀에

 

아들을 향해 칼을 들어야 하는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때 아브라함은 믿음의 말을 합니다.

 

 

"야훼이레"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다.

 

 

이말은 자신의 사랑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이 이 생명을 창조하셨고 나역시 그분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느님 아브라함 그리고 이사악은 이제 개별자가 아닌 우리가 됩니다.

 

 

이 자비와 사랑이 마리아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치리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마리아는 본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실재로 온전히 아들을 봉헌하였지만 이사악을 죽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아들을 실제로 십자가상에서 봉헌하셨습니다.

 

 

 

구약과 신약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오늘의 마리아의 마니피캇을 통해

 

하느님의 계약적 사랑이 하느님의 성실함과 마리아의 믿음으로 이어져 영원히 실현되어나감을 말합니다.

 

 

 

*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하시고 너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어머니는 자녀들 때문에 환성과 기쁨을 갖습니다.

 

 

오늘 성모님의 마니피갓을 묵상하며 ...

 

내가 죽을때 마지막 순간 내 생애를 뒤돌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생각해 봅니다.

 

 

 

서거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질문하신

 

 '당신은 행복합니까? 저는 행복합니다. 행복하십시오!!" 라는 말씀이 눈물나게 나가 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때 저에게 남겨주신 유지!

 

 

 " 행복한 사제 되십시오.

 

 좋은 사제 되시어 본인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한것이아니라 우리 모두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행복에 구분없는 그런 행복한 사제가 되십시오!"말씀하신의미를 알것같습니다.

 

 

 

능력있는 사제 존경받는 사제보다도 아버지는 능력이 없어도 드러나지 않아도 아들사제가 행복하길

 

그리고 그 행복이 자신만이 누리는 행복이 아닌 우리안에서 누리는 행복이길 바라셨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이며 누가 누리는 것일까요?

 

 

 

엘리사벳은 놀랍게도 "당신은 여인준에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말합니다.

 

 

저는 놀랍게도라는 말을 썼습니다.

 

 

보통여인이 임신을 했다면 그렇게 말하지만 마리아는 사실 인간에 불과하기에

 

 하느님이시며 성자이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 아기가 복되시며 그 아기를 임신한 당신도 복됩니다."라고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점을 깊이 묵상해야합니다

.

 

여기서의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행복할때 바로 내안의 하느님 또한 행복하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위해 우리는 행복해야할 의무와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할 권리를 갖습니다.

 

 

행복해야할 권리 즉 행복추구권은 권리이며 하느님 자녀의 의무입니다.

 

 

저는 참 행복한 사람이며 행복해야할 사람이거늘 늘 행복의 은총을 놓칩니다.

 

 

특히 말씀을 선포하는 이 엄청난 지혜와 특권을 마음껏 누리지 못했습니다.

 

마음껏 누리지 못했다는 것은 누가 나를 방해해서가 아니라 내안의 죄 게으름때문입니다.

 

 

 

앞으로 성심으로 더 강론을 준비하여야겠습니다.

 

 

 

2007년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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