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진리와 정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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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0-05-31 | 조회수34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진리와 정의 주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위로하신다.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신다. 주님의 힘이 함께하는 한 그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예언자는 비로소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세례자 요한은 억울하게 죽는다. 예수님의 죽음과 같다. 헤로데(현대 : 세상를 지배하고 싶은 교만한 인간 모두)의 부정을 지적하다 변을 당한 것이다. 하느님이 그를 위로할 것이다.
하느님,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성 요한 세례자를 통하여 성자의 탄생과 죽음을 미리 알려 주셨으니, 그가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순교한 것처럼, 저희도 그를 본받아 끝까지 주님의 진리를 믿고 증언하게 하소서!(금요일 복음)
예례미야 고독을 즐기고 소박함을 사랑하였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그를 꼼짝 못하게 사로잡으시어 억지라도 예언을 하게 하셨다.
예례미야는 메시아시대의 결과들 특히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질 새로운 관계에 대하여 집중하였다. 마음에 새겨질 새 율법 (정치의 법이 아닌, 성령의 법)이 나오리라고 내다 보았다. 이 새 계약은 인간의 내심을 변화키는 것이다. 새 계약은 머리보다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알아 뵙게 만들어 백성을 사랑하시는 그분을 진정 받들어 섬기게 한다고 말한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그분이 오시면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그분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며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주실 것이다.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서 16, 7 - 15>
"그분(성령)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며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고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성령의 법)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정말 심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참된 예언자들은 유일하신 참 하느님, 주님의 거룩하심을 천명한다. 당대의 상황을 판단하고 죄와 악습 (인간의 사랑의 결핍으로 모든 죄가 발생하는 인간 내심을 보지 않고 우상을 섬기고 또한 계급적 투쟁, 정치에 의한 미움)을 질책한다.
그리하여 평화와 희망을 간직하라고 일깨운다. 참된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자들과 끊임없이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고 온갖 수난을 겪는다. 참된 예언자들은 동시대인들에게 미리 대처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그들의 소리는 들은 체 만체 당하기가 일쑤이고 독신생활과 생활의 고난으로 살아간다.
< 흰 두루마리, 십자가 막대기, 허물어진 담, 나무 >
세례자 요한은 그 자체가 ''하늘의 경고''인 존재였다. 그는 근본적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경계 대상자'' 였다. 세상의 지배자(세상의 왕, 우상)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잠재적인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세상과 타협한 이들에게서 ''깨어 있을 것'' 을 요구하는 ''광야의 소리'' 였다. 피곤한 운명이며 수축하고 덮수룩한 머리에 여윈 모습일 수 밖에 없다. ( 자료 : 네이버에서 참조 )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의 정신(거짓 예언자와 싸우는 야훼의 종)과 능력을 지니고 주 예수님의 오심에 앞서 광야에서 소리를 외친다. 광야의 외침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이를 전하는 소리이다. 광야에 존재하는 '직접적인 유혹'을 물리치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올곧게 듣는' 곳이 광야이다. 광야는 악의 유혹과 세상의 시련을 거치고 성령의 인도를 준비하는 장소이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은 야곱의 우물에서 참조> 사막(광야)에서는 사방 어디에서나 늘 똑같은 그림만 보일 뿐이고 정적이다. 그런데도 광할한 사막은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빛을 발한다. 무한성과 영원성에 대한 예감이 사막(광야)에서는 우리 자신의 제한성과 연약성을 만난다. 이런 긴장 속에서 자기 안에 있는 사막(광야)을 발견한다. 각 개인이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세상은 부조리와 불평등으로 가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자기 중심적 (혹은 인간 중심주의) 사고는 정당한 시각이 아니다. 그 근거는 세상의 주인은 '자신(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진리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세상은 하느님의 질서에 맞추어 돌아가지 내 질서에 맞추어 돌아가지 않는다는 자명한 진리가 설파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삶의 해방과 자유가 정치와의 만남이 아닌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한 진정한 관계성' (가톨릭의 깊은 보화)에 숨어 있음을 그리고 '하느님과의 만남'이야말로 삶의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근원적 체험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기 위해 사막(광야)으로 갔다. 사막(광야)에서는 사방 어디에서나 늘 똑같은 그림만 보일 뿐이고 정적이다. 그런데도 광할한 사막은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빛을 발한다. 무한성과 영원성에 대한 예감이 사막에서는 우리 자신의 제한성과 연약성을 만난다. 이런 긴장 속에서 자기 안에 있는 사막(광야)을 발견한다.
안토니오 성인을 포함하여 초기의 수도승들은 단지 물질적 쾌락을 상대하지 않기 위하여 또 자신들의 '세상' 도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회적 기대치(정치 논리)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더 깊고 풍요로운 ("버려라") 실존에 '깨어 있기 위하여' 사막으로 간 것이다.
토머스 머턴은 이렇게 말하였다. "사막의 교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다운 자아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교부들은 세상(정치 논리) 속에서 만들어진 자아를 완전히 거부하였다.
그들은 알려져 있지 않은 또한 자유롭게 선택하는 하느님의 길을 찾았다. 그 길은 사람들(세상적)이 앞서 그려놓은 길, 다른 이들로부터 전해 받은 길(정치적)이 아니었다. 교부들은 다른 사람이 고정시켜 놓은 '주어진 하느님' (귀로만 들어왔던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홀로 발견할 수 있는 하느님을 추구했다" 고비 사막을 넘었던 메스너 역시 사막에서 숨처럼 단조롭고 너무나 고요하여 물을 마시거나 귀를 기울이기 위해 멈출 때마다 그 소리에 놀라곤 하였다. 그곳에선 고요와 드넒은 대지가 마치 시간을 삼켜 버린 것같았고 귀청을 통해 들리는 소리를 통해서만 대지의 살아 있는 움직임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예전보다 더 나은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정작 마음 속에 도사린 사막(광야)은 무덤과 같다. 무감각한 삶은 온갖 소비주의 문화에 길들여진 채 번잡하다.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은 미로에 가로막힌 채 우리 영혼은 방황한다. 충만한 삶이란 그저 먹고 마시며 들떠 있는 소란스러움이 아니다. 충만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자아의 깊은 부분을 살아내는 것이다.
욥에게 있어서도 자신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받고 있으니 세상과 하느님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고발한다. 그러나 하느님과 만남을 통해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경험과 이성만을 앞세운 이기적인 판단이요 오만이었음을 깨닫고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온 '귀로만 들어 왔던 분'이었음을 고백한다. '귀로만 들어 왔던 하느님'은 '내'가 아닌 '그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직접 체험이 아닌) 체험된 하느님일 뿐 실상 내 실존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존재일 수 있다.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실제의 삶이 행복과 구원으로 충만되지 않는 이유는 그저 남들의 신앙과 화려한 이론에 의해 소문 (정치논리)으로만 전달된 하느님을 알고 있을 뿐 자신의 내면에서 체험되고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의 시발점으로 삼았지만 이제부터는 죽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십자가)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정치적인 논리에 입각한 사랑이 아니다) <2008,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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