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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율법의 처음과 끝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03 조회수860 추천수16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9주간 목요일 - 율법의 처음과 끝

 

 

사람이 사랑에 빠져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아름다워집니다. 서로에게 잘 보여야하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사랑하게 되면 예뻐지게 하는 호르몬이 나와 더 예뻐진다고 합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멋있게 보이기 위해 여자가 싫어하는 나쁜 버릇들을 고쳐나갑니다. 그리고 여자가 좋아하는 것은 더 열심히 해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는 ‘행복’해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가끔 먼 곳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면 확실히 누군가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행복하게 합니다.

그런데 만약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행복해지려고 한다면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게 됩니다. 돈이나 권력, 인기 등을 바라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깨끗이 씻고 먼 곳을 바라보면서 부자가 되는 상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내 현실로 돌아오면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짜증이 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을 해서는 안 된다, 혹은 이것을 해라 하는 법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613가지로 구체적으로 나누어 지켰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돼지고기를 못 먹고 안식일에 엘리베이터 스위치 하나 누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을 잊은 율법주위를 가장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첫째가는 계명이냐는 질문에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랑을 빼고 형식에 치우치다보니 그 법의 정신을 잃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행해지는 율법에 따르지만 참 사랑의 정신을 잃은 수많은 희생제사와 예식들을 비판하십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성전을 뒤집어엎으십니다. 장사꾼들과 도둑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오시다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려 죽이셨습니다. 사랑이 없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예식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도 그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그렇게 파괴되었습니다.

 

모든 하느님의 법의 본질은 ‘사랑’, 하나로 귀결됩니다. 십계명의 첫 3개는 하느님 사랑, 나머지 7규정은 이웃사랑으로 나뉩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가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과연 하느님을 사랑해서 그 분을 일주일에 단 한 번이라도 만나고 말씀을 듣고 성체를 영함으로써 그 분과 한 몸이 되려는 의도로 나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빠지면 고해성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까요?

소금은 모든 음식에 들어갑니다. 소금으로 간이 되지 않으면 아무 맛도 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모든 규정의 소금과 같습니다. 우리가 지켜가는 모든 것들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껍데기이고 간이 되지 않은 음식입니다.

 

테니스를 처음 배울 때 공을 치지 말고 밀라고 합니다. 테니스는 탁구와 달라서 공을 쳐서 넘기는 것이 아니라 밀어서 넘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기술은 늘지만 이 기본을 잊게 됩니다. 그래서 몇 년이 지나 더 잘 치게 되었어도 다시 마음속으로 ‘밀자, 밀자...’를 되뇌며 볼을 칩니다.

사랑하면 내 자신도 더 나아지고 결국 행복해지는 것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면 죄도 안 짓고 거룩해집니다. 그리고 행복해집니다. 하나를 넘어뜨리면 모두 조르르 넘어지는 도미노처럼 사랑이 시작이요 끝입니다.

 

<< 짧은 묵상 >>

세상 모든 것은 ‘셋이면서 하나’인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 셋이면서 하나의 원천은 당연히 ‘세 분이시면서 한 분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한 분이시면서 성령을 통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은 그 분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려고 해야지 그 보이는 것에만 너무 신경쓰다보면 오류에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립보는 예수님을 보면서 계속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성령님과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세상 모든 것들의 보이지 않는 면을 보도록 매 순간 초대받고 있습니다. 절대 현상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덜 믿고 어떤 사람은 조금 더 믿습니다. 조금 더 믿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더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 같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수 많은 서로 다른 종교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둘을 제시해 주십니다. 이 둘보다 더 큰 법은 없다고 하십니다. 법도 셋이자 하나에서 나옵니다. 성령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하나가 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할지 모릅니다. 하느님 사랑은, 마치 성부께서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계시듯이, 이웃 사랑 안에 감추어져 있는 법의 본질입니다. 즉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마치 성자께서 성부를 세상에 보여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육체를 지니시고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누구도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눈에 보이는 이웃사랑이 아니고는 절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안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먼저 찾으면서도 이웃사랑이 실천되지 않는 종교라면 그것은 사실 예수님께 대한 사랑도 거짓인 종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 안에서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표현됩니다. 우리가 이웃사랑 안에서 더 깊은 무엇을 드러내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겉으로 보기에 어떤 선행이든 단팥 없는 찐빵이 되고 맙니다. 겉으로는 선행을 하더라도 하느님 사랑이 아니라 잘못된 의도로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웃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어야 하고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사랑의 성령님 안에서 삼위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 내가 천사의 말을 한다해도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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