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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겉과 속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05 조회수691 추천수17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9주간 토요일 - 겉과 속

 


 

얼마 전에 논문지도 교수 신부님과 마지막 모임을 하고 한국 음식을 대접해드리기 위해 로마 시내에 있는 음식점에 모시고 갔습니다.

신부님은 굳이 포크 대신 젓가락을 사용하시며 식사를 하셨습니다. 불고기를 대접해 드렸는데 젓가락질을 잘 못하시는 관계로 음식이 식탁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교수님은 스스럼없이 손으로 음식을 집어 드셨습니다.

또 저의 교수님은 클러지 셔츠를 입는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엽구리가 뜯어진 바지를 입고 다니시기도 합니다. 그 날도 버너를 올려놓고 불고기를 구웠기 때문에 더우셨는지 음식을 먹다가 윗도리를 벗고 러닝셔츠만 입고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주인 자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혀 신부님 같지 않으세요!”

아마 그 자매님의 머리엔 끌러지를 입고 긴 수단을 늘어뜨리고 한 손엔 성경을 든 그런 사제의 모습을 상상하고 계셨나봅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교수 신부님만큼 신부님 같은 신부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나라 전통을 존중하시기 위해 굳이 그 나라 문화대로 젓가락질을 배우려 하신 것이고 음식 하나 버리지 않기 위해 손으로 집어 드신 것이고 당신은 버려진 옷을 주워 입으시면서도 돈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내어놓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리스도께서 지금 사셨더라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제는 세상이 원하는 그런 모습의 사제가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는 사제가 되어가야 할 것입니다.

 

한 할아버지가 도시에 살다 놀러온 손자를 데리고 해변으로 나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바윗돌들을 가리키며 그 돌들 위에 아름다운 것들이 굉장히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손자가 가까이 가서 보았을 땐 시커멓고 울퉁불퉁한 것들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못생긴 돌 하나를 떼어냈습니다. 그리고 반을 갈랐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안엔 매끈하고 무지갯빛이 나는 아름다운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굴이었습니다. 겉 표면과는 너무 다른 굴의 속을 보고서 아이는 참 신기해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치 이 아이와 같이 속보다는 겉모습에 더 중점을 두는 시선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영이시고 물질은 창조된 것들이며, 영혼은 영원하고 육체는 썩어 없어질 것이며, 보이는 것은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육체보다는 영이,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고 겉모습 보다는 영혼의 모습에 더 중점을 두며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겉모습에 더 치중하게 되는 이유는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고 잘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할까요? 스스로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은 그 안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 됩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더라도 양심은 그렇게 심판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로부터 평가절하 된 자신의 존엄성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숨기며 가식적으로 잘 보이려고 합니다. 정말 하느님께 인정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마치 성인들처럼,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이나 명예가 아니라 ‘멸시’를 청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의 위선적인 모습과 과부의 보이지 않는 헌금을 비교하시며 누구를 닮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율법학자는 긴 옷을 입고 인사 받기 좋아하고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고 잔치에서는 가장 윗자리를 즐깁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 긴 수단을 입고 인사 받는 것을 좋아하고 성당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고 식사 자리에서는 가장 중앙에 앉았습니다. 어찌 이리 똑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과부는 아주 작은 액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비교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당연히 과부의 모습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옥에는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입고 다니고 그렇게 보이려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영은 생명을 주고 육은 죽음으로 이끈다.

 

<< 짧은 묵상 >>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는 행동 중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핑계’를 댄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핑계를 댑니다. 하느님이 그들 마음을 모르시지 않으실 텐데도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해서라도 작게 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이렇듯 하느님께나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께 밉보였다고 양심이 판단하면 사람은 그것을 보상받기라도 해야 하듯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려고 자신을 포장합니다.

오늘 복음엔 율법학자들과 가난한 과부가 대조되어 등장합니다.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갖은 수를 쓰는 사람들을 대표하고, 가난한 과부는 어디 보여주기도 창피한 액수를 헌금함에 넣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세상은 겉모습을 좋아합니다. 예전엔 비싼 차를 끌고 다니면 지방에선 경찰들이 아예 잡지 않는 경우들도 많았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힘도 당연히 있을 텐데 괜히 딱지 한 장 잘못 끊고 큰 불상사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당연히 돈 많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고, 강하게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이미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 하여도 끊임없이 잘못을 무마하기 위해 핑계를 대고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전가시킵니다. 결국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끼리 잘못을 전가시키면서 자신들끼리도 친해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골방에서 문을 잠가놓고 하고 오른 손이 착한 일을 하거든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한다면 점점 더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그 사이에 끼어드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에만 알아야 하는 것들을 회사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 사람의 관계는 종말에 접어 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둘 만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과부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바치면서도 누구에게 그것을 자랑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가 더 쉽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 과부의 비밀스런 행위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과부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하느님과의 비밀스런 관계를 더 깊게 하기 위해 ‘침묵’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삶 안에서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핑계’를 대지 않을 것을 권합니다. 물론 착한 일을 한다면 왼손도 모르게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하느님만이 알아 줄 무엇’을 쌓아가는 것이 그분과의 더 깊은 관계를 맺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가 없었다면 물론 하느님 앞에서 핑계를 댈 거리도 없었을 것이고, 또한 핑계도 대지 않았을 것입니다.

 

 

 
 
 
 
< 나 그대를 사랑하기에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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