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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Eucaristia: 감사의 봉헌과 한 몸이 됨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06 조회수697 추천수13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 Eucaristia: 감사의 봉헌과 한 몸이 됨

 


 

얼마 전 어떤 수녀님이 박사논문을 유학 십년 만에 끝내서 교수님께 제출했다고 해서 식사를 대접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정말 지나가는 사람도 못 알아볼 정도로 고생고생하며 논문을 제출했는데 기분이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아닌 무언가 공허하고 응어리가 가슴에 있는 듯 한 기분이 든다고 하였습니다.

동료 수녀님의 도움으로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결국 깨닫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봉헌’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는 드렸지만 아직도 그 결과를 자신의 것으로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답답했던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은 바로 성당으로 뛰어가서 다시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바쳐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정말 편안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기 때문에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리지 않고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이렇게 우울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머리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인데 양심이 슬퍼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편안하게 하려면 결국 모든 것이 하느님 것임을 고백하고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 분만이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당신이 하느님께 받은 모든 것을 온전히 봉헌할 줄 아셨던 분은 ‘마리아’이십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께 청하는 것은 ‘당신의 것을 모두 봉헌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습니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은 당신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하시며 당신 모든 것은 ‘주인님’ 것이라는 것을 밝히십니다. 이렇게 성모님은 당신의 ‘인성’ 모두를 성자께 봉헌하십니다.

성자께서는 이 봉헌을 받아들여 성모님의 ‘인성’을 취하십니다. 그저 취하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당신의 ‘신성’을 나누어 주십니다. 성모님이 성자의 신성을 나누어 받지 않았다면 성모님이 승천하시거나 영원히 사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인성이 아닌 하느님의 ‘신성’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모님의 봉헌과 성자의 자기를 주시는 선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그리스도, 즉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몸은 곧 ‘성체’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봉헌’이 없었다면 ‘성체’도 없습니다. 이렇게 성모님은 성체 안에서 성자와 한 몸을 이룹니다. 이것이 ‘새로운 계약’이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교회’의 신비로운 모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카인의 제물을 기꺼워하지 않으신 이유는 그 안에 ‘감사’, 즉 ‘Eucaristia’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곧 봉헌이고 봉헌은 곧 하느님의 선물이 되며 이 신비를 통해서 봉헌자와 하느님이 ‘Eucaristia’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같은 성체를 영하더라도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정도는 사람마다 차이기 나게 되어 있습니다. 적게 봉헌한 사람은 적게 그분의 신성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성모님처럼 모든 것을 봉헌하면 그 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그 분의 신적 본성, 즉 사랑, 기쁨, 평화 등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미사에 올 때 은총을 많이 받기 위해서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던 것처럼 모든 것을 봉헌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봉헌한다 하여 소위 ‘봉헌의 삶’을 산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 것도 봉헌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봉헌은 물질로부터 시작되기는 하지만 그 완성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것은 곧 매 순간 자신의 뜻이 아닌 나와 한 몸이 되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오게 하여 백성들을 먹였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을 당신의 살과 피로 배불리시고 목마르지 않게 하십니다.

광야에서 배고파하는 오천 명은 세례 받은 신자들을 상징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 나왔을 때 그들이 접한 것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었고 사막에는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는 출발에 불과하고 우리가 도달해야 할 하느님나라는 아주 멀리 있습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고 성당에 나오지 않는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는 불가능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사람들을 돌려보내 마을에서 각자 무엇을 사 먹도록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럴 돈도 능력도 가장 중요한 ‘믿음’도 없습니다.

필립보는 어떤 어린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져오라고 하시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결국 제자들이 먹을 것을 주게 된 것입니다.

이 성체의 기적은 제자들의 믿음, 즉 사제들의 믿음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성체는 성모님의 믿음과 봉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매번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순간에 성모님께서 아드님을 잉태하실 때의 그 감사와 봉헌과 믿음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 없는 성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미사도 이와 똑같습니다. 신자들은 각자 자신들이 가져온 것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사실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사제들에게 봉헌하는 것입니다. 주일 미사 때 신자가 빵과 포도주를 사제에게 봉헌하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어린이가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봉헌했듯이 신자들은 자신들이 일해서 번 것을 사제들을 통해서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그것을 받아 예수님께 봉헌합니다. 대사제이신 예수님은 그것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봉헌하는 예물을 받으시고 은총을 주십니다. 항상 주고받는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봉헌한 미약한 예물에 당신의 희생제물을 함께 바칩니다. 사실은 그분의 희생제물인 살과 피에 우리의 작은 정성이 합쳐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희생제물을 받으시고 은총으로 되돌려주십니다. 은총은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은총을 사제들에게 나누어주시고 사제들은 그것을 신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제단 위에 올라와서 성체를 영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빵을 나누어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자신들이 사제에게 봉헌한 대가로 되돌아오는 성령님의 풍성한 은총을 받습니다.

사막에서 음료와 음식이 없으면 살 수 없듯이 신자들도 성체와 성혈을 모시지 않으면 가나안 땅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물론 음식을 매일 먹는 신자와 일주일에 한 번 먹는 신자의 건강상태도 똑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미사를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은총도 다르게 받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음식이 약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기가 떡을 먹으면 죽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 음식을 똑같이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한 번 성체를 영하더라도 그 효과를 극대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 생애에서 가장 은총이 있었던 미사는 아마 신학교 처음 들어가서였을 것입니다. 저는 일반 대학교를 다니다가 늦게야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왠지 그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뭐가 부족해서 여기 들어와 있는 거지?’ 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냥 대학 나와서 취직하고 결혼생활 하면 될 것을 ... 다 포기하고 들어왔는데 별로 행복하지 않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중에 사순절이 되었고 성주간이 되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냥 밥을 굶어보고 싶었습니다. 식사에 빠지면 안 되니까 나가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 먹는 것만 구경하였습니다. 이틀 째 굶으니 뱃가죽이 등에 붙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을 수시로 단식했던 간디나 성체만 영하면서 살았다던 성인들이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다음날 미사 때 성체를 영하는데 눈물이 나왔습니다. 성체가 예수님의 몸이라기보다는 아주 조금이라도 배를 채워주시는 예수님께 감사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침을 먹는데 밥알 수를 세면서 먹었습니다. 한 알 한 알이 어떻게 그렇게 선명하게 보이는지 신기했습니다. 밥에게 감사한 것이 아니라 밥알 하나하나에게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깨달았습니다. 며칠 못 먹으면 허우적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기억은 신학교 때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큰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하느님께 제 자신을 진정으로 봉헌하기 시작한 때는 신학교에 들어와서가 아니라 바로 ‘저를 불러주셨음에 감사하게 된 때’부터였던 것입니다. 제 자신을 감사히 봉헌하니 조금씩 그 분과 더 한 몸이 됨을 느꼈고 제 자신이 사람들에게 성체를 전달해 주는 사람만이 아닌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제 안에 조금씩 사시게 되고 저도 그 말씀 안에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감사의 봉헌’은 ‘성체’가 ‘인성과 신성의 혼인’인 것처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게 합니다.

 

 

 
 
 
< 주께 드리네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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