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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통의 대가(大家)들" - 6.10,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11 조회수410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열왕기 상18,41-46 마태5,20ㄴ-26

 

 

 

 

 

"소통의 대가(大家)들"

 

 

 

위로 하느님과 옆으로 형제들과의 소통의 원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물론

오늘 1독서의 예언자 엘리야 진정 소통의 대가들입니다.

 

어제 예언자 엘리야에게서 하느님을 빼버리면 아무 것도 아니라 했는데

오늘은 문득 하느님에게서 엘리야를 빼버린다면

하느님의 처지가 어떻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은 참 답답하고 난감하셨을 것입니다.

그 당시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대신해

바알 예언자들을 대적할 사람은 예언자 엘리야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절대 단독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당신의 일꾼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모순적 말 같지만 신적(神的)일수록 인간적(人間的)입니다.

하느님과 소통이 깊어질수록 하느님과의 신뢰도 깊어집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참 나의 실현입니다.

오늘 1독서의 예언자 엘리야는

하느님과 원활한 소통으로 깊은 신뢰 관계 안에서

참 나를 살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소통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은

다만 하느님의 백성들을 하느님께 모으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 엘리야의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 매력적입니다.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니, 이제는 올라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아합 임금이 물러나자 엘리야는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고 자기 시종에게 묻습니다.

 흡사 기도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

어릴 적 양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거꾸로 된 하늘과 산을 보면서 재미있어 했던 추억도 연상됩니다.

아마 엘리야 예언자는 거꾸로 머리를 박고

비구름이 떠오르길 애타게 기다렸을 지도 모릅니다.

무려 일곱 번이나 시종에게 확인하지 않습니까?

 

“올라가서 바다 쪽을 살펴보아라.”

 

문득 떠 오른 게 옛 임금들이 드리던 기우제였습니다.

큰 가뭄이 들면 자신의 부덕의 소치로 알아

금식하면서 하늘에 기우제를 드렸던 임금들처럼,

예언자 엘리야가 아합 임금을 대신해 기우제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3년 동안 하느님과의 불통으로 가뭄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들,

엘리야의 지도에 따라 바알의 우상들에게서

하느님께로 발길을 돌리는 순간

하늘이 활짝 열려 쏟아지는 큰 비요,

바로 하느님과의 소통이 회복되었음을 뜻합니다.

 

과연 예언자 엘리야 소통의 대가로,

소통의 원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하느님께 꼭 필요한 예수님이요 예언자 엘리야였습니다.

과연 우리도 하느님께 꼭 필요한 사람들일까요?

하느님께 꼭 필요한 사람들,

고집불통의 사람들이 아니라 소통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하느님과의, 이웃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끊임없이 공동전례 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소통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란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완전 소통 상태를 사셨던 주님의 확신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옛 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과의 완전 소통으로 이심전심의 상태가 아니면

결코 이런 전권의식 가득한 말씀 못 합니다.

율법주의를 넘어 율법의 참 뜻을,

하느님 마음을 밝혀주는 예수님이십니다.

민심이 천심이란 말도 있듯이

하느님과의 소통과 이웃과의 소통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직접적 살인 이전에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바보나 멍청이라고 하는 멸시하는 마음의 살인까지 뿌리 뽑아야

하느님과의 원활한 소통이라는 것입니다.

제단에서의 하느님과의 소통에 앞서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와 화해로 소통한 후

당신과의 소통의 전례에 참석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과의 수직적 소통과 형제들과의 수평적 소통은 함께 갑니다.

도저히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여 우리 소통의 중심에

십자가의 그리스도께서 자리 잡고 계신 것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소통의 중심인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위로 하느님과의 소통을, 옆으로 형제들과의 소통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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