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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예수 성심 대축일 2010년 6월 11일 )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11 조회수380 추천수4 반대(0) 신고

예수 성심 대축일    2010년 6월 11일


루가 15, 3-7,  에제 34, 11-16.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은 13세기 유럽 여성 신비가들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성체에 대한 신심도 13세기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성찬을 중심으로 발생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먹고 마시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였습니다. 성체조배, 성체거동 및 성체강복 등 성찬 거행에서 분리된 성체 신심은 13세기에 발생하였습니다. 8세기에 봉건 제도가 확립되면서 유럽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10세기에 와서 유럽 봉건사회는 경제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1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유럽 각지에서 대성전 건립이 추진되었습니다. 이 대성전 건립 운동의 와중에 환시(幻視)에 매료된 여성 신비가들이 나타나고, 그들을 중심으로 느낌과 감동을 중요시하는 예수성심 신심이 보급되었습니다.


이 신심은 “심장을 바꾼다.”, “예수의 심장을 내 안에서 뛰게 한다.”, “찔린 예수의 심장에 보상을 드린다.”, 등의 감상적(感傷的) 표현을 낳았습니다. 그리스도와 결혼한다는 상상을 유발시키는 표현들도 이 신심 운동의 특징 중 하나였습니다. 예수성심 축일의 고유 미사가 제정된 것은 1670년입니다. 그후 프랑스 파레르모니알 수녀원의 마가렛드 알라코크 수녀가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을 이야기하였고, 그것이 중세 유럽 교회에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세계 교회 전체를 위해 예수성심 축일을 정한 것은 1856년의 일입니다.


19세기는 성심의 세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국민이 프랑스 혁명 때에 저지른 죄를 용서받기 위해 프랑스 국민이 헌금하여 수도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위에 건립한 성당이 성심 성당이라고 이름 지어졌습니다(1873-1907). 19세기에 설립된 수도회들 중 40개 정도가 그 회의 이름에 “성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18세기말부터 19세기에 걸쳐서 유럽을 지배한 감상주의는 예수성심 신심을 가톨릭신앙의 중심에 갖다 놓았습니다. 신학은 합리성을 추구하는 철학적인 어려운 개념들 안에 갇히고, 신앙은 감상적 느낌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하느님과 좋은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복되다, 지금 우는 사람들!”(루가 6,21)이라는 복음서의 말씀과 시편 84장(7절)에 나오는 “눈물의 골짜기”라는 표현이 대중을 쉽게 감동시켰습니다. 눈물이 없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는 말이기도 하였습니다.


각 시대가 강조한 신심의 형태가 있습니다. 환시적 신비가들 시대에 발생한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은 감상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눈물과 연결되어 예수에 대한 감상적 언어를 많이 발생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예수성심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쉽게 울고 감동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과학적 사고를 하면서, 각자가 필요한 정보를 받아 자유롭게 삽니다. 신앙인은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복음서들의 이야기에서 정보를 받아 각자 자유롭게 실천하면서 삽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하느님을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목자에 비유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에제키엘서가 오늘 복음 말씀의 출처입니다. 에제키엘서는 말합니다. “나는 내 양떼를 돌보리라...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리라. 상처 입은 것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힘나도록 잘 먹여 주고...이렇게 나는 목자의 구실을 다 하리라.”


루가복음서 저자는 이 말씀이 예수가 하신 실천을 요약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리고 병든 이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헤매는 것을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을 도로 데려오고, 상처 입은 것을 싸매주며 아픈 것은 힘나도록 해 주는 일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삶과 말씀에서 정보를 받아 새로운 실천을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해야 합니까? 오늘 우리에게는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세리도 없습니다. 우리는 병이 나면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고 병원을 찾아갑니다. 우리는 오늘 병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찾아가 돌보아주는 목자의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교회에는 교회로부터 외면당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냉담자로 분류된 사람들, 조당에 걸렸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인들이 외면하던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교도들을 소홀히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교권 당국이 고집하는 권위에 비판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만 지켜야 한다고 믿지도 않으셨고, 성전 안에만 하느님이 계신다고 믿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을 할 때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있는 사람들, 그것이 세리이든, 병든 이든 혹은 장애인이든, 그들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선하신 하느님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시며,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시기에 예수님도 같은 실천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숨어 계십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길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숨어 계십니다. 하느님이 숨어 계신 것은 그분이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삼가지 않고 조심스럽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남에게까지 연장하고 확장하여 자기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우월감, 권위주의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삼가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침묵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과감하신 분입니다. 세상을 만들고 자유를 지닌 인간을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필립 2, 7)고 바울로는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삼가셨기에,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우월함과 권위를 드러내지 않고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과감하셨기에 유대 교권 당국과 갈등을 겪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왜곡하면서 당신 스스로 죽지 않는 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 성심을 생각하는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예수님에 대한 정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심어진 곳에서 삼가면서, 그러나 과감하게 예수님의 일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삼가면서 그러나 과감하게 내어주고 쏟아서 새로운 삶을 발생시켜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내어주고 쏟아서 수확을 올려야 하는 탈란트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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