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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주님과 나 사이에 아무런 격의가 없다면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17 조회수384 추천수2 반대(0) 신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오 6:7-15)

말은 사람 사이를 소통하는 수단이며 벌어진 틈을 매워 주는 방편이다. 그 틈이 크면 많은 설명을 해야 하므로 말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러나 주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런 격의(隔意)가 없어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대로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할 때에는 미쳐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틈새가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했다. “마치 우리보다 새가 더욱더 하느님 가까이 있는 것처럼 하늘나라를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의 어원(語源)은 2사무엘(7:27), 1열왕(8:28)에서처럼 ‘중재한다’, ‘사이에 들어간다’는 뜻을 갖고 있다.  
우리는 기도라고 하면 마음속의 생각과 감정을 하느님께 표현하기 위해 소리 내어 하는 기도인 ‘소리기도[念經祈禱]’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이 ‘소리기도’는 어떤 기도문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정성스럽게 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신자들이 관상기도(觀想祈禱)를 곁들이고 있다.
 
불교에서는 참선을 할 때 스님들은 특정한 주제,
예들 들어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우주의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럼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와 같은 화두(話頭)를 정하고 이에 대해 깊은 사색과 명상을 함으로서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깨달으려고 한다. 그 대상에 있어선 차원이 다르나 방법론적인 면에서 이와 비슷한 것이 바로 관상기도이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들이 가장 많이 하는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의 생애와 부활,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기도하셨기에 당신에 관한 말씀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아버지’께 기도할 때에는 예수님께 기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기도 드린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워낙 우리들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뵐 수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마치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눈을 통하여 오로지 ‘아버지’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기도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로 끝나게 된다. 예를 들면 마침 영광송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하고 기도한다.
 
관상기도는 ‘주시옵소서’의 기도가 아니라 ‘버림’의 기도, ‘비움’의 기도이다.
하느님을 깊이 만나기 위해서는 영혼의 고요함과 깊은 침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며 하느님 자체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관상(contemplation)이란 하느님과의 하나 됨의 신비한 체험이다.
이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리며, 지금 여기에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인식(awareness)과 의지(willingness)를 가지고 하느님의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열린 자세이다.
이는 행함(doing) 보다는 이 순간의 존재(being)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마음이 충만한 상태이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있고 성취하고 있어도 지금 이 순간 나를 잃어버리고 하느님을 놓치고 있다면 그 성취와 바쁨은 오히려 나와 하느님을 파괴하는 도구가 될 뿐이다. 관상기도는 ‘비움’이란 부정의 방법(via negativa)을 통해 모든 마음의 이미지와 사고와 감정을 뛰어 넘어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인식하며 그렇게 되기를 기원하는 의지 속에서 고요한 그리스도의 영 안에 우리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이미지와 욕망 등은 병적인 자아를 보호하고 방어하려는 속성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다. 이런 자기중심적 자세 즉 자아의 종 노릇 하려는 경향에서 벗어나 온전히 하느님 중심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한,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부르든 그 하느님은 우리가 만들어내어, 우리 속에 가두어둔 우상(偶像)에 불과하며 이런 상태에서는 하느님과의 일치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그러므로 참된 하느님 체험은 우리 자신을 뛰어 넘은, 머리가 아닌 마음의 차원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헨리 뉴웬의 표현대로 우리가 머리의 기도를 가슴(마음)의 기도로 대치해 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성경말씀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지의 구름 (Cloud of Unknowing)』에서 무명의 저자는 “오직 마음으로만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열린 마음으로는 하느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으나 머리만으로는 오직 간접적으로 희미하게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라는 뜻이다.
 
관상기도는 가슴으로, 하느님의 마음과 눈으로, 쉬지 않고 드리는 오랜 역사를 가진 신비적인 기도이다.이 기도는 마치 편안한 호흡과도 같아서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엄마의 따뜻한 사랑의 눈길을 응시하며 편안히 숨을 쉬며 안식을 누리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엄마의 따뜻한 품에 안겨 사랑의 눈길과 마주 대하는 그 순간 아이에게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또 다른 좋은 예는 놀이에 열중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다. 좋아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이에 심취해 있는 아이는 그 놀이 외에는 전혀 다른데 관심이 없다. 오직 이 순간 그 놀이에 자신의 전 존재를 몰입하여 그 놀이에 만족하고 그 놀이를 즐긴다. 그래서 옆에서 밥 먹으라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순간 이 아이에게는 자신과 놀이가 온전히 하나인 것이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로마 8: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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