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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군중과 여론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17 조회수424 추천수0 반대(0) 신고
최근의 지방 선거(2010년 6월2) 결과가 대다수의 여론조사와 정반대의 결과로 나온 것을 두고 ‘여론조사의 실패’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다. 그런데 이 ‘여론’의 정체를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페르시아의 성인(聖人) 루미가 쓴 『마스나위』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예언자 다윗 시대에 “당신께서 저를 연약하고 쓸모 없는 사람으로 만드셨으므로 일하지 않아도 매일 저에게 빵을 주십시오.”하고 밤낮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바보스러운 끈기를 비웃었지만 그래도 계속하여 기도했다.
마침내 그의 기도 덕분에 암소 한 마리가 집에 뛰어 들어왔기에 그는 암소를 잡아 먹었다.
이는 신께서 어떤 기도보다도 성실한 사람의 기도를 좋아하신다는 예언자의 말을 입증하는 것이다. 만물이 신을 찬양하지만 무생물의 찬양과 사람의 찬양이 다르며, 수니 교도의 찬양은 자브리(Jabri) 인들의 찬양과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남의 잘못을 말하지만 세속을 초월하지 않은 사람은 진리를 모른다.
나름대로의 지혜와 확신 때문에 여론이 갈리게 된다.
이 때부터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마음 속에 진리의 시금석을 간직하고 있는 신성한 사람이 아니면 좌익이 무엇인지 우익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다.
두 의견 사이를 헤매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둥지로 날아간다.
지혜는 두 날개를 갖고 있지만 여론은 한 날개밖에 없다.
여론은 연약하며 한쪽으로 기울어져 비스듬히 날아간다.
날개가 하나뿐인 새는 금방 떨어져서 두 걸음 정도 퍼덕거리며 날아간다.
여론의 새는 그의 둥지에 갈 희망을 갖고 한 날개로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날아간다.
여론의 새가 여론에서 벗어나서 지혜를 알게 되면 두 날개를 얻게 되어 여론과 지혜 사이를 오간다. 그 뒤로는 “비굴한 얼굴을 하지 않고 망설이지도 않고” 바른 길을 곧 바로 날아 오른다. 그는 마치 가브리엘 천사가 여론에 휩쓸리지 않고 표리부동하지 않고 헛소리를 하지 않듯이 두 날개로 힘차게 날아 오른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그에게 “당신은 확고하게 신의 길을 가고 있소.”하고 말해도 더욱더 정진할 뿐만 아니라 고귀한 영혼을 망각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당신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소. 당신은 미풍에도 흔들리는 풀 잎사귀지만 당신 자신을 바위라고 생각하고 있소.”하고 말해도 비난에 못 이겨 여론에 빠져들지도 않고 군중의 증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조금도 나쁜 생각에 빠지지 않고 원수의 비난에도 슬퍼하지 않는다.》
 
또 키에르케고르(Kierkegaad)가 1846년에 쓴 『The Present Age』중에 나오는
<On the Difference Between a Genius and an Apostle>에서 군중과 여론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보면 그의 천재성을 드러내고 있는 같다.
 
“군중(群衆; the public)”은 과거에 한 번도 성취하지 못한 이상적인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떼를 지어 행동에 옮기고 각 개인에 대한 책임을 지며
각 개인이 자신을 표현해야 하며 가부간(可否間)의 결정을 즉시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회가 현실을 은폐하여
아무런 사조(思潮)를 이루지 못하게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이나 조직에서도 한 번도 뭉치지 못하고
각자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비현실적인 개인들을
미디어에서는 “군중” 또는 “여론”이라고 부르면서 추상을 만들어 낸다.
여러 사람이 모여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 군중이지만 이러한 몸을 발견할 수가 없다.
모두들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고 너무나 추상적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그들을 “군중”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군중이 점점 커져서
열정이 없고 부질없는 생각을 많이 하는 시대를 많이 만들어서 현실을 도외시하고 있다.
이 거대한 군중이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삼켜버려 형체가 없는 그런 시대가 곧 올 것이다.
 
 군중”은 사람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며
한 세대가 아니며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며
공동체가 아니며 사회가 아니며
연대(連帶)도 아니며 그 장소에 모인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 사람들은 실체로서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중에 속한 개인은 아무도 자신의 권한을 남에게 위임할 수 없다.
그가 군중에 참여하고 있을 때나 그가 두드러지게 표나지 않을 때에만
군중에 속하게 되며 표나게 두드러진 사람이면 군중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개인들로 구성된 군중은 거대한 힘을 갖고 있지만
두드러지지 않고 추상적인 사막이며 무(無)이므로
막강하기도 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도 된다.
 
 열정이 없고 부질없는 생각만 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과 관련해서
매체는 추상적인 유령인 군중을 만들고 있으며 군중은 이러한 평준화의 결과로 생긴 것이다.
(왜냐하면 신문은 개인을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인 의미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피를 흘리지도 않고 게으르기 때문에
더 많은 개인들이 군중이 되기 위하여 즉 추상적인 하나가 되기를 열망한다.
그것도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모든 참여자가 매사에 제3자의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군중이 존재하게 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으른 집단인 군중이 기분전환을 위하여 어떤 사람이 했거나 성취한 것을 군중에게 화제거리로 제공할 생각을 한다.
 
군중은 애완견을 갖고 있다.
이 개가 매체(媒體)이다.
군중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분수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군중은 애완견을 그에게 보내어 즐기게 한다.
물기도 하는 이 개가 그의 옷을 물어뜯고
꼬리를 치며 군중이 싫증이 나서 그 개를 물리칠 때까지
개는 그의 다리로 모든 저속한 자유를 누린다.
그것이 군중을 평준화시키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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