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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12주일 2010년 6월 20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18 조회수772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제12주일    2010년 6월 20일


루가 9, 18-2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답합니다. ‘세례자 요한, 혹은 엘리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나서서 답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함께 모이고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과 실천을 따릅니다. 이렇게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회상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오늘 우리가 가진 복음서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기억한 것을 그들 자신이 먼저 실천하였습니다. 그들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는 그들이 하던 실천도 함께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믿었는지를 알립니다.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은 당신이 죽었다가 부활할 것을 예고하신 것으로 복음서는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은 그리스도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이 말씀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깨달은 바와 그들이 실천하던 바를 반영합니다. 십자가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죽음이 있기 전에는 유대인들에게 신앙과 관련지어 통용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다는 말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있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이 십자가의 죽음을 넘어서도 살아 계시다고 믿으면서 나타난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은 메시아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수정합니다.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강자였습니다. 막강한 힘으로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군림하는 메시아입니다. 그 메시아를 시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그는 다른 나라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철퇴로 짓부순다.”(2, 9). “자칫하면 불붙는 그의 분노, 금시라도 터지면 살아남지 못하리라.”(2, 12). 수백 년 동안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던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오면, 강대국들을 쳐부수고 이스라엘이 세상 만방을 통치하게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꿈꾸던 메시아 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강자가 군림하고 강자 편에 서는 사람이 살아남고 부귀와 영화도 누립니다. 인류역사가 꿈꾸고 기대한 하느님은 항상 강자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염원은 강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강자가 항상 옳고 모든 일에 있어 유리합니다. 강자인 하느님에게 빌고 제물을 바쳐서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겠다는 것이 인류 역사에 나타난 민속신앙들입니다.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도 이런 인류의 기대와 상상을 넘어서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주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는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 신앙은 전혀 다른 하느님을 말합니다. 강자인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입니다. 강자는 사랑하지 않고 지배합니다. 사랑하는 이는 약자가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 위에 강자로 군림하지 않고 약자가 되어 자녀를 지켜보고 자녀의 말에 귀 기울이며 그를 섬깁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 안에 당신의 사랑이 살아 있을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십니다. 사랑은 바라고 견딘다고 바울로 사도(1고린 13,7)는 말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이 우리의 자유 안에 흘러들어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을 바라고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자기 하나 잘 되기 위해 독야청청(獨也靑靑)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버리면서 상대를 위하는 데에 있습니다.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살 것”이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이 표현하는 바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위축시키고 그에게 고통을 주면서 자기 스스로는 기고만장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고통 받는 사람과 더불어 괴로워합니다. 하느님은 인간 세상이 만드는 비극에 예수님과 함께 약자가 되어 참여하셨습니다. 우리가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이 사랑하셔서 약자가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약자가 되어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십니다. 사랑하는 데에 전능하시다는 뜻입니다. 어떤 여건에서도 사랑하고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무엇이라도 되어 줄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로부터 비롯된 신앙을 이 세상의 이야기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강자로 만들었습니다. 예언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 세상의 지배자와 같은 하느님을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은 무서운 분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주는 법은 어김없이 지켜야 하고, 그분이 요구하는 제물은 철저히 바쳐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그분의 뜻을 그슬린 죄에 대한 벌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과 병고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믿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사랑으로 극복해야 하는 불행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 사랑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잃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인은 그분의 십자가를 자기 시야에서 잃지 말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새로운 세상 질서를 여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여는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강자가 아니라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약자가 소중하게 보이는 질서,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자가 돋보이는 질서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에 나타난 질서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사랑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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