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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가 알고 있었다면 당신에게 왜 말하지 않았겠소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19 조회수375 추천수1 반대(0) 신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오 6:24-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가장 놀라운 일 가운데 하나는 먼 거리를 여행한 후 몇 달 후 다시 제 집으로 돌아오는 동물과 새의 귀소(歸巢) 능력이다. 이러한 현상을 ‘이주(移住, migration)’라고 부르는데, 이 동물들은 나침반이나 지도의 도움 없이 전에 가보지 못한 수천 마일 떨어진 목적지를 찾아간다. 
특히 새는 이러한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 예를 들면, 북극 지방의 제비갈매기는 생후 6주 밖에 안 된 어린 새도 따뜻한 곳을 찾아서 7,700km를 여행한다. 여름이 돌아오면 이 새는 다시 북극의 자기 둥지를 찾아 돌아온다. 이에 대한 과학자들의 견해는 분분하다.
그들이 훈련을 받았을까? 그들이 태양을 따라서 갔을까? 북극성이 그들을 인도했을까? 누구도 이 상황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할 수 없다. 로마 사람들은 새가 개구리로 변한다고 믿기도 했다. 그들은 사람이 자는 밤중에 새가 떠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새를 이주 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시험해 보았다.
그는 영국 웨일즈 해안에서 큰흰배슴새(Manx Shearwater) 한 마리를 잡아 다리에 띠를 맨 후 미국의 보스턴으로 운반한 후 거기서 그 새를 풀어 주었다. 그랬더니 그 새는 정확히 12.5일 후에 3,000마일 떨어진 자기의 보금자리에 돌아왔다. 큰흰배슴새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바다를 홀로 건너 자기의 보금자리로 안전하게 도착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에 대하여 많은 학설들이 주장되었지만 아직 명백한 학설은 나오지 않았다.
새의 뇌 안에는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새와 다른 동물들의 내부에 ‘시계와 나침반’을 장치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느님께서 자연계의 생물을 창조하실 때 저마다 어떤 능력과 본능을 주셨다.
자연은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이 법칙에 잘 순종한다. 나무가 위로 자라지 않고 땅 속으로 자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하늘에서 바위가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을 것이다. 강물은 어디로 흘러가야 바다를 만날 수 있는지 걱정하지 않는다. 강물은 그것을 몰라도 바다를 만난다. 온 사방에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하느님께 순종하기 때문이다.
새들도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본능을 따른다. 만약 사람도 자연과 같은 태도를 갖게 된다면 하느님을 거역하고 자신과 이웃을 파멸로 이끌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맞아들여 진정한 행복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이 잘못되지나 않을까 항상 걱정하면서 산다. 그래서 우리 시대를 ‘불안의 시대’라고 부른다.  ‘Anxiety’는 라틴어 ‘angere’에서 나왔는데 ‘질식시키다, 숨이 막히다(to choke)’의 뜻을 갖고 있다. 이는 걱정하게 되면 자멸(自滅)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을 때에는 숨이 막히게 된다.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목을 잡게 되어 숨을 쉬지 못하는 것과 같다. 걱정과 두려움은 분명히 다르다. 사람들은 ‘두려움’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모를 때 ‘걱정’이라는 단어를 쓴다.
끊임없이 걱정을 하면 몸에 배이게 되어 제2의 피부처럼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따라서 아무 걱정도 하지 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영혼을 다른 신에게 바쳐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으므로 우리 모두 성자들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하느님께 기도해야 한다. 무례한 사람은 주님의 은총에서 제외되므로 우리는 예를 갖추고 존경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
무례한 사람은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지 못하고 세상 만방에 불을 지른다.
사거나 팔거나 말하거나 듣지도 않았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사막에 있는 모세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리로 잔치 상을 마련해주셨다.
그런데 모세의 백성 가운데 무례한 사람들은 “마늘과 콩은 왜 없느냐?”고 투덜댔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잔치와 빵은 그 즉시 끝장나버리고 곡식을 심기 위한 삽과 수확하기 위한 낫으로 우리들이 힘들게 땅을 파서 농사를 짓도록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설득하시고 기도하시자 하느님께서 다시 풍성한 식탁을 마련해주셨다. 그런데 또 다시 무례한 사람들이 예를 갖추지 않고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식사에 초대 받은 욕심 많은 손님처럼 음식을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음식은 없어지지 않고 줄어들지도 않고 영원히 주어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시면서 진심으로 하느님을 존경하라고 당부하셨다.
섭리(攝理)는 운명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고통을 주시어 섭리를 일깨워주시는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다. 하느님께 순명(順命)하는 것이 섭리이다.
 
영국의 시인 오든은 ‘운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었다면 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겠소?(If I Could Tell You)>
                              W. H. Auden
내가 당신에게 말한 대로 시간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요.
시간만이 우리가 치러야 할 가치를 알아요.
내가 알고 있었다면 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겠소
?

우리가 아무리 광대들의 재주에 눈물 흘리고

음악가의 연주에 취할지라도
내가 말한 대로 시간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요.

어떤 운명도 미리 알 수 없어요
.
당신을 말할 수 없이 사랑하는데

내가 알고 있었다면 당신에게 왜 말하지 않았겠소?

바람이 어딘가에서 불어오겠죠
.
나뭇잎이 죽어가는 이유도 있겠죠
.
그러나 시간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요.
내가 알고 있었다면 당신에게 왜 말하지 않았겠소?

장미들은 훌쩍 자라고 싶을 거예요
.
꿈은 진정 변하지 않고 싶을 거예요
.
그런데 내가 그 이유를 알았다면 당신에게 왜 말하지 않았겠소.
 
사자들이 모두 일어나 떠나고
시냇물과 군인들이 모두 달아난다 해도
내 말처럼 시간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요?
내가 알고 있었다면 당신에게 왜 말하지 않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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