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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살과 순교의 차이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20 조회수822 추천수14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12 주일 - 자살과 순교의 차이

 

 

한 분이 갑자기 저를 찾아와 면담을 신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척 보기만 해도 매우 불안정하고 정신적인 큰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너무 당황스럽고 끔찍해서 어떤 위로도 해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 분에게는 자녀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자녀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부모의 지나친 관심이 자녀를 매우 힘들게 하였고 그 부담감에 지친 자녀는 어느 날 출근하면서 자녀를 학교에 데려다 주기 위해 기다리는 아버지 차 옆으로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갑자기 난 쿵 하는 큰 소리에 차 문을 열어보니 그 옆에 죽어있는 아이는 바로 자신의 아이였던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이는 감정은 이미 죽어 없어진 아이에 대한 ‘미움’이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짓을?”

아버지는 그 분노 때문에 아무런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어쩌면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보복에 성공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이미 사라져간 자신의 생명은 되돌릴 길이 없는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순교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돌아가신 노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 많이 당선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현 정권과 고인이 된 노 전 대통령의 정권을 하나의 대결구도로 보고 있고 실제로 현 정권의 집요한 수사로 인해 그 분의 죽음이 야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우리는 그 분의 죽음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과연 자살과 순교의 차이점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실 것을 알고 굳이 죽음을 선택하여 걸어가셨으니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죽기를 원하였으니 자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유다는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목숨을 끊었으니 회개요 순교라고도 말하기도 합니다.

 

순교 성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그것이 자살인지 순교인지 구별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한 예로 우리나라 성인 중에 성 쁘로다시오 정국보 성인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성 쁘로다시오 정국보는 개성의 명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가 직무상 과실로 벌을 받자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신분을 감추고 새끼 꼬는 일을 하면서 미천하게 살았습니다. 30세 경에 입교하여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영세한 후 부인과 함께 홍살문 근처에 살면서 성사를 보기 위해 서울로 모여드는 교우들을 돌보았습니다.

가난과 병고로 14자녀를 모두 잃으면서도 남을 위해 봉사하며 독실한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타인의 밀고로 부인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되어 형벌과 형관의 감언이설로 결국 배교하여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석방되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배교를 뉘우치면서 다시 형조에 달려가 배교한 것을 취소하고 죽기를 원하였습니다. 여러 차례 형조로 찾아가 자신이 교우임을 떳떳이 밝혔으나 형조의 문지기는 이를 거절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굽히지 않고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형조판서에게 직접 교우임을 밝히면서 다시 5월 12일에 체포됩니다.

정 쁠로따시오는 자기가 처음 배교하였던 그곳에서 곤장 25대를 맞아 41세로 순교하였는데 그날이 1839년 5월 21일이었습니다.

이 분도 어찌 보면 자살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끝까지 죽기 위해 자신이 천주교인임을 밝히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 분을 순교 성인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순교도 죽는 것이고, 자살도 죽는 것인데 그 결정적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로 여기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기도 하고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도 한다고 보고합니다.

예수님은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직접 당신을 누구로 여기느냐고 물어봅니다. 그 때 베드로가 사도단의 대표로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하며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중하게 당부하십니다.

그리고는 즉시 당신의 죽음에 대해 예언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당신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하고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르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누구나가 당신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순교와 자살’, 이 두 죽음 중의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자살이란,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이 향하는 종착역입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자기만을 사랑하기에 더 이상 자신을 죽이기를 원치 않아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다가 자살을 한 것은 진정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죽이고 무릎 꿇기를 거부할 만큼 자신이 커져있기에 하느님께 저항하는 의미로 자살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대한 마지막 할 수 있는 공격이요 보복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살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죽음입니다. 모두가 지금의 힘든 삶을 끝내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자살은 그래서 극단적인 이기주의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그 이기주의로 죽이는 하나의 살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자살을 절대 허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순교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는 그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겸손을 넘어서서 당신 자신과 온 인류에 구원의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자살이 자신과 주위 사람의 죽음과 슬픔으로 끝나는 것에 반해 순교는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생명과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들도 우리가 당하는 고통들이 진정 내 개인의 교만이나 이기주의에 의한 죽음인지, 혹은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순교인지 잘 따져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하나의 자살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버리고 용서하지 못하기에 자신도 죽이고 상대도 죽이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용서는 하나의 순교입니다. 내가 죽어야 나에게 고통을 준 이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용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생명을 전해줍니다.

 

오늘은 연중 12주일인 동시에 남북통일 기원 미사가 있는 날입니다. 북한과 화해하고 서로 하나가 되자는 것은 좌익이라며 비판만 한다면 결국 그런 모습은 북한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죽음을 부르는 자살로 향하는 모습입니다.

죽으려고 하면 산다는 말씀대로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이웃에게로부터 시작하여 갈라진 우리 형제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죽이고 용서하는 모습을 지녀야겠습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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