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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6.20,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22 조회수361 추천수5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6.20 연중 제12주일

즈카12,10-11; 13,1 갈라3,26-29 루카9,18-24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날마다 하느님 찬미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온 땅은 춤추며 하느님을 기리라.

  그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여라.

  빛나는 찬미를 하느님께 드려라.”

 

“온 땅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나이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가 영적 감각을 일깨워

늘 하느님 현존을 의식하며 깨어 살게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느님께 가는 내적여정의 우리 인생입니다.

며칠 전 읽은 기사 내용이 너무 생생합니다.

인천 교구 새 보좌주교(정 신철) 착좌식에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이신 강우일 주교님의 축사 내용입니다.

 

강우일 주교는 ‘과연 천국에 누가 가느냐?’로 축사를 시작했습니다.

“어떤 교우가 명이 다해서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천국 문을 지키고 있던 베드로 성인이 ‘너는 누구냐?’라고 묻자,

  그 교우는 ‘아무개입니다.’라고 하자

  다른 질문 없이 ‘통과’하며 바로 천국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 교우는 천당 입성 절차가 너무 간단해서

  참으로 싱겁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주 후에 수녀님이 천당에 오자 꽃다발이 수여되었습니다.

  한 달 후에는 오케스트라가 천당 문에서 연주되고

  주교님 한 분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교우는 베드로 성인에게 따졌습니다.

  ‘제가 들어올 때는 통과 한 마디로 끝내시더니

  수녀님이 오시니까 꽃다발을 주고,

  주교님이 오시니까 오케스트라까지 동원되니,

  여기서도 사람 차별하십니까?’하고 따졌습니다.

  베드로 성인은 ‘모르면 가만있게’라며,

  ‘이 주교는 백 년 만에 한 명 온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찌 주교뿐이겠습니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합니다.

윗자리에 오를수록

저절로 부, 권력, 위선, 교만이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하여 성직자든, 수도자든, 평신도든 그 누구든

윗자리에 올라갈수록

깨어 가난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려는 노력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가기는 지극히 힘들 것입니다.

강 주교님의 위의 말씀은 특히 성직자, 수도자들에게 경종이 됩니다.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근본적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똑같은 제목으로 세 번째 하는 강론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세월 흘어 나이 들어갈수록 기도시간도 늘어나야 합니다.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사람 모두가 기도의 사람입니다.

기도 없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영혼도 점점 시들어 죽어가 내적 힘도 잃어갑니다.

가난과 진실, 겸손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살기위하여’ 밥 먹듯이. ‘살기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수도승들은 이런 절박한 마음으로

‘생명줄’이신 하느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성무일도 기도를 드리고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도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로 시작됩니다.

특히 루가복음에는 수시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참으로 ‘기도의 사람’이신 예수님이셨고

모든 믿음의 사람들 예외 없이 기도의 사람들이셨습니다.

저에겐 성당 맞은 편 창밖의 언제나 그 자리에 서있는 초록 나무들이

기도의 스승들입니다.

하늘 안, 하늘 향해 침묵 기도 중인 나무들 같고

바람에 눈부시게 반짝이며 휘날릴 때는

성령 충만하여 찬미기도를 바치는 모습같이도 보입니다.

좌우간 하루 스물 네 시간 평생을 꼬박 하늘 향해 서있는 나무들은

‘끊임없는 기도’의 모범입니다.

예수성심대축일, 사제의 해를 마감하며

최창무 대주교님의 인터뷰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기자는 주교님에게 시험문제를 냈습니다.

‘사제는 ( )이다. 그리고 사제는 ( )로 살아간다.’

여러분 같으면 이 괄호 안에 무슨 말을 집어넣겠습니까?

주교님의 답은 (기도하는 사람) 그리고 (성체성사)였습니다.

매일 성무일도를 열심히 바치고,

미사를 정성스럽게 봉헌하면

그 속에서 사제의 존재 이유와 사제직의 은총이 절로 살아난다는

주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대로 주교님 평생 삶에 대한 고백으로 봐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팔십 가까운 노령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겸손한 외양에 눈빛 또한 여전히 맑고 밝았습니다.

어찌 사제뿐이겠습니까?

참으로 주님을 믿는 이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어야 하고

성체성사로 사는 사람들 이어야합니다.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 물어야 합니다.

 

매일

‘수도자는 누구인가?’묻고

날마다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자가 수도자라 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참으로 주님을 믿는 자라면

누구나 매일 내가 누구인지 묻고 날마다 새롭게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래야 진정 정체성 또렷한, 살아있는 삶입니다.

세상을 얻은 들 자기를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 빠져, 탐욕에 빠져,

갖가지 중독으로 자기를 잊고 사는 사람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기도 중에 정체성 문제에 봉착하자

제자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십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에 대한 답이 신통치 않자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스승의 정체를 꿰뚫어 본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입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오해를 해소시켜 주고자 보완설명을 하십니다.

기존의 지배하고 다스리는 권력의 메시아 개념을 대폭 수정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훌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바로 이 메시아개념을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깨닫고

주님의 입을 빌려 고백하는 제자들입니다.

고난-배척- 죽임-부활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망라한,

종과 섬김의 삶에 전념하셨던 메시아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와 직결되는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하여 주님을 섬기는 학원인 수도원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을 살아가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면 나를 모르고 그리스도를 알면 나를 압니다.

그리스도는 참 나의 정체성의 열쇠입니다.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참 나의 실현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갈수록 '참 나'가 됩니다.

하여 분도 성인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십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그리스도가 우리 정체성의 뿌리임을 열정을 다해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옷 입고 살아가는 우리들, 바로 이게 우리의 정체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없이 참 나를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참 생명인 그리스도를 잊어 영원한 미궁 속에 헤매다

‘참 나’를 찾지도, 만나지도, 살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허무하게 세상을 마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막연한 정체성이 아니라

이렇게 구체적으로 살 때 정체성 또렷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입니다.

끝까지 이렇게 살아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주님을 알수록 참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안다해도 그리스도를 따라 살지 않으면

진정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과정입니다.

‘날마다’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죽을 때 까지 평생, 항구히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지름길도, 첩경도, 요행도, 비약도 없는 구원에 이르는 삽자가의 길입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위대한 수행은 이 것 하나뿐입니다.

주님을 위해 자기를 버릴수록 가난과 겸손의 은총이요

이 은총의 힘이

제 십자가를, 제 책임의 십자가, 제 운명의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피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주님이 주신 이 제 십자가요,

이 제 십자가 없이는 참 나가 되는 길도, 구원의 길도 없습니다.

주님의 엄중한 말씀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바로 주님 때문에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이

참 나를 찾는 구원의 길임을 확인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하여 제가 단골로 인용하는 예가 있습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일어나고,…’

바로 이게 십자가의 길이자 우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자포자기 하여 일어나지 않는 게 죄라고 무수히 강조합니다.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수히 넘어졌을 것이고,

때로 다 놔버리고 싶은 유혹도 겪었을 것이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곧장 일어나

믿음으로 다시 살아왔기에 오늘 지금 여기 축복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유일한 희망, 주님을 바라보라.

 

최 주교님이 인터뷰 중 누차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늘 기도하면서,

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구원의 행복입니다.

충만한 참 나의 정체성 또렷한 삶입니다.

'그 날에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 주민들의

 죄와 부정을 씻어 줄 샘이 터질 것이다.'

즈카르야의 예언대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죄와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시고

당신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어

우리 모두 제 십자가를 잘 지고 당신을 따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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