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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을 심판하지 마라" - 6.2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22 조회수386 추천수5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6.21 월요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1568-1591) 수도자 기념일

열왕기 하17,5-8.13-15ㄱ.18 마태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아침기도 후 나오다가

신발장의 열한 수도형제들의 신발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얼굴도, 헤어스타일도 다 다르듯, 다 다른 신발들이었습니다.

함께 살아도 생각, 성격, 기질이 다 다른 수도자들입니다.

다름을 틀린 것으로 여겨,

다름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해,

이 다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획일화의 경향 때문에

오해로 인한 심판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풍요로움을, 자유를 의미합니다.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다름은 모두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새삼 다양성의 풍요로움과 자유를 질식시키는 획일화가

얼마나 잘못된 죄인지 깨닫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심판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습니다.

너그러울 때는 한없이 너그럽다가도 좁을 때는

바늘 하늘 들어갈 여지도 없는 옹졸하기 짝이 없는 마음들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잣대가 아닌

이런 인간의 잣대에 의한 심판은 위태하기 그지없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제일 쉬운 게 남을 심판하는 것이요

제일 어려운 게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하여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라 합니다.

모였다 하면 대부분 사람들 이야기이고

고백성사 때 고백하는 죄의 대부분도 이웃을 심판했던 내용들입니다.

이래서 침묵을 강조하는 것이요

새삼 남의 말 않는 것이 큰 덕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를 몰라서 남을 심판하는 것이지

자기의 부족과 한계를 알아갈수록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지’하며 이해하고 수용합니다.

어찌 보면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를 알아감으로 이해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오해와 착각에서 기인하는 심판이나 다툼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운 분별이요,

반대로 사랑이 사라졌을 때 미움에서 나오는 심판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사랑할 때는 문제없었던 일들도

사랑이 사라져 미움과 불신이 자리하면 온통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이래서 사랑은 분별의 잣대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자기(ego)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일체의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시고 받아들이십니다.

끝없이 참고 견디어내며 회개의 때를 기다리십니다.

분도 성인 역시

형제들의 약점을 심판하지 말고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 하십니다.

사랑 없는 불완전한 판단으로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누구나 지닌 자기(ego)라는 들보요,

이 들보가 뜻하는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이기심, 탐욕 등이 있는 한

‘있는 그대로’ 보기는 정말 힘들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심판은 불완전한 나(ego)의 투사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문제이기보다는 나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다.”

 

바로 이 들보를 약화시키기 위한 평생 수행입니다.

들보가 사라져야 사심이나 사감 없이

사랑의 맑은 눈으로 상대방의 티를 빼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깨끗한 마음’을 목표로 한 우리 수행생활이요,

‘아파테이아’를 목표로 한 동방수도승 생활입니다.

둘 다 들보가 사라진 무사(無私. 無邪)한 사랑의 마음을 뜻하니,

명칭만 다를 뿐 지칭하는 내용은 똑같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심판들은 하느님의 심판이기보다는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심판임을 봅니다.

심판을 보류하고 끝까지 회개의 때를 기다리시는

너그럽고 자비하신 주님이십니다.

오늘 열왕기 하 독서의 이스라엘 백성들,

배은망덕하게도 하느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이방인의 풍습을 따라 산 결과

정체성의 상실로 자초한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탓할 대상은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임을 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주시고

'나(ego)'라는 들보를 빼내주시어

깨끗한 마음, 맑은 눈으로 하루를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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