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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나지르인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23 조회수807 추천수16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 - 나지르인


 

우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도 ‘삼손’이란 인물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나지르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님께 선택된 사람을 ‘나지르인’이라고 합니다. ‘나자렛 사람’이란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이기에 태어날 때부터 선택된 분입니다.

나지르인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으로 ‘삼가다’ 또는 ‘스스로를 봉헌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Nazar’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삼가해야한다‘는 의미를 함께 포함하고 있는 이 말은 우리에게 큰 묵상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몸에 칼을 대지 않아 수염과 머리를 자르지 않았고, 포도주와 같은 술을 마시지 않아야 했으며, 시체를 만지거나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즉, 태어날 때부터 ‘삼가’ 혹은 ‘절제’ 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가장 유명한 나지르인은 물론 삼손입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이었고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의 비밀을 데릴라라는 여자에게 말하고 맙니다. 그래서 그의 머리카락이 잘리고 눈도 뽑혀서 더 이상 봉헌된 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무리 하느님께서 태어나기 전부터 뽑아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끝까지 그 봉헌 의무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부르심도 소용없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것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손도 결국 다시 회개하여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게 됩니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만나는 장면에서 세 명의 나지르인의 놀라운 만남을 보게 됩니다. 즉, 처음부터 주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선택되어 원죄 없이 잉태되셨던 마리아와, 인류의 구원자로 그 태중에 계신 예수님, 또 메시아와 그의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한 소명을 지니고 태어날 요한이 함께 만나는 것입니다.

이 세 분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들이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끝까지 봉헌생활을 완수하신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삼손과 구약의 다른 나지르인들에 비해 완전한 봉헌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아기는 자랐고 또 ‘영’으로 굳세어졌다.” (루카 1,80)라고 합니다. 즉 ‘성령님’이 세례자 요한과 처음부터 함께 하셨다는 뜻입니다. 원죄가 있는 인간은 세례를 통하지 않고서는 성령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즉, 세례자 요한도 어느 순간에 세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언제일까요?

 

바로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만날 때입니다. 이 때 성모님의 태중에 계시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엘리사벳에게 부어주시고 그 성령님은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기에게까지 전달된 것입니다. 엘리사벳과 뱃속의 아기는 그래서 기쁨에 뛴 것입니다. 기쁨은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원죄 없이 태어난 사람이 셋 있는데, 마리아, 예수님, 세례자 요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여자의 몸에서 난 이 중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이는 없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성모님과 예수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시기도 하고 원죄 없이 태어나시기도 한 분들입니다.

 

보통은 성인들이 순교하신 날이나 돌아가신 날을 축일로 지냅니다. 하느님나라에서 빛나는 별과 같은 영혼으로 새로 태어나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독 세례자 요한만 탄생일을 순교일보다 더 크게 기념하고 대축일로 지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렇게 그분의 탄생 자체가 그분의 순교만큼 신비로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성령님을 충만히 유지하기 위해 나지르인으로서 ‘삼가는’, 즉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삼손처럼 중간에 삼가는 삶을 살지 않을 때는 더 이상 봉헌생활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영과 육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르면 영적인 생활은 포기하는 것이고 육체의 욕망을 절제한다면 그만큼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이라고 불렀지만, 예수님도 공생활을 하시기 전에 40일간 단식하고 밤새워 기도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인간이 육체로 짓는 죄를 보속하시기 위해 육체로 받아야 하는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은 이미 당신 안에 당신 육체의 욕망을 이길 수 있는 성령님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절제’조차도 성령님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죽이는 삶은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그를 본 사람들이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라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게 합니다. 즉, 지금까지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여 벙어리가 되었던 아버지 즈카리야의 입을 열어준 것입니다. 즈카리야는 입이 열리자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봉헌한다고 해서 신학교나 수도원에 입회하였다가 가정에 자신이 꼭 필요할 것 같아서 다시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봉헌은 요한처럼 가족에게까지 생명을 전해주게 되어있습니다. 가족을 돌보겠다고 걱정하는 것보다 온전히 봉헌생활을 하는 것이 가족을 위해서도 더 낫습니다.

 

그리고 가족만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사람들의 마음을 메시아에게 돌려놓습니다. 예수님의 첫 두 제자가 요한의 제자들이었음을 상기하면 이미 메시아에게 잘 준비된 제자들까지 봉헌한 셈입니다. 그리고 많은 제자들과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리자 “신부를 차지하는 것은 신랑이다. 그러나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쁨에 넘친다.”(요한 3,29)고 하며 예수님이 커지시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순교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강한 햇빛으로 나오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것처럼 태양은 새벽의 여명을 미리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태양이신 예수님은 당신을 감당할 수 없는 우리의 눈을 위해 여명인 세례자 요한을 미리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뜨면 여명은 더 이상 존재 할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자신은 점점 작아져야 하고 그리스도는 점점 커져야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모든 제자들과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께로 가고 자신은 칼에 순교하여 사라지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사라짐으로 그 뒤에 계신 분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성령의 힘이 아니면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죽이는 순교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기름이 채워져야 자동차가 가는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하면 그 힘으로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도 어느 의미에서는 부름 받은 나지르인이고 그렇게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로서 당연히 세례자 요한의 절제와 봉헌의 삶을 본받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 기뻐하라 내 영혼아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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