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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24 조회수927 추천수12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0년 6월 24일 목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He asked for a tablet and wrote,
“John is his name,” and all were amazed.
Immediately his mouth was opened, his tongue freed,
and he spoke blessing God.
(Lk.1.) 
 
 
제 1독서 이사야서 .49,1-6
제 2독서 사도행전 .13,22-26
복음 루카 1,57-66.80
 
 
어제 저녁 학생 미사 때 강론을 시작하면서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서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 제가 강론을 두 가지 준비했는데 어떠한 것을 할까요? 첫째는 길지만 재미있는 강론이고, 둘째는 재미는 없지만 짧은 강론입니다. 자~~ 어떤 강론을 할까요?”

과연 학생들은 어떤 것을 선택했을까요? 아마 많은 분들이 두 번째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겠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학생들은 미사를 그렇게 재미있게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두 번째 비록 재미는 없지만 짧은 강론을 선택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학생들의 반응은 전혀 없음이었습니다. 그냥 고개만 숙이고서 ‘떠들어라. 나는 관심 없다.’라는 식이었지요. 저는 그 썰렁한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 얼른 다른 이야기로 화재를 바꾸고 말았습니다.

저에게는 뜻밖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의 관심 없는 그 모습이 문제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는 저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학생들을 좀 더 이해하지 못했던 마음,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라고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그 결과에 학생들을 맞추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을 간직했던 적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내가 정말로 대단한 사람인양 어떤 결론을 미리 내리고 그 결론에 다른 것들을 맞추려고 하는 모습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 과정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했으며, 그들의 아픔과 상처는 어쩔 수 없는 과정 속의 하나일 뿐이라고 치부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이기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을 맞이하여 복음은 주님의 뜻에 따르는 그의 부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르야는 ‘세례자 요한을 낳게 되리라’는 말을 믿지 않아서 귀가 멀고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기의 이름을 결정짓는 명명식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자신의 이름이 아닌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결정하지요. 그리고 엘리사벳은 여자의 권위가 그렇게 높지 않던 그 사회에서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유로 힘 있게 앞으로 나와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모습이 세례자 요한에게도 전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따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종종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더 따르고 싶어 합니다. 더욱이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더욱 더 좋아 보이고 관심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내 뜻을 따를수록 주님과는 멀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 인해서, 다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던 즈카르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따르려 할 때, 우리의 입도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뜻만 옳다고 박박 우기지 맙시다.





속뜻도 모르면서(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중에서)

 우리는 흔히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만 보고 쉽게 판단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그 현상의 내부를 천착해 들어가다 보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때도 있습니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인 게지요. 깊이 생각하고 항상 '왜 그럴까'라는 의문을 품고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광산 주변에 사는 한 아버지가 자신의 두아들에게 금 섞인 광석을 채집해 오라고 말했습니다. 두아들은 아침 일찍 수레를 끌고 광산으로 향했지요. 그런데 이 두아들의 성격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선, 성질 급하고 욕심많은 둘째는 수레를 채우는 일에 급급해서 금이 섞인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돌멩이를 모아 순식간에 수레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차분하고 꼼꼼한 맏아들은 금이 많이 섞인 것을 하나하나 고르느라, 해질 무렵까지 애를 썼어도 수레에 절반도 채우지 못했습니다, 두아들의 모습을 구경하던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지요.

 '저 집은 둘째가 맏이보다 낫구면. 둘째는 수레를 가득 채워 가는데 맏이는 반도 못 채웠으니 말일세!"

 이 소리를 들은 둘째는 기분이 으쓱해져 콧노래까지 부르며 수레를 끌었습니다. 반면 맏아들은 조금 불쾌했지만 개의치 않고 열심히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며칠뒤 공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두 아들이 해온 금 섞인 광석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요? 아버지는 둘째를 꾸중하고 맏이를 칭찬했답니다. 왜냐하면 맏아들의 수레에서는 주먹만한 금덩이가 서너덩이나 나온 반면, 둘째의 수레에서는 반덩이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분명히 작은 아들은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수레에 채워진 양을 보면 분명히 작은 아들의 수레가 가득 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돌멩이나 채운 수레와 꼼꼼하게 금이 섞인 돌멩이를 채운 수레의 차이는 결국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를 판가름나게 하였습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지나가는 투로 인정을 받는 것이 나을까요? 아니면 자신과 함께 사는 아버지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나을까요? 분명히 후자의 경우겠지요.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보통의 모습이 어쩌면 이 둘째 아들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여지는 가치나 척도를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지는 않나요? 조금을 캐더라도 보석같은 것을 취할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Brian Crain - Two Spirits So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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