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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나라 비전" - 6.27,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27 조회수359 추천수6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6.27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열왕기 상19,16ㄴ.19-21 칼라5,1.13-18 루카9,51-62

 

 

 

 

 

 

 

"하늘나라 비전"

 

 

 

얼마 전 신문에서 읽은 기사가 생각납니다.

경기도 연천 전곡읍 깊숙한 산기슭에

저소득층 여학생을 위한 미술, 공예 대안학교인

'화(花)요일 아침 예술고'를 준비하고 있는

홍문택 신부님에 대한 참신하고 감동적인 기사였습니다.

신부님의 인터뷰 중 한 대목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내 영혼이 하느님과 하나 되면 하느님이 모든 일을 해 주신다.”

 

바로 이게 하늘나라의 현실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 살아야 하는 ‘하늘나라’입니다.

여러분은 꿈이, 비전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비전이, 꿈이 있어야, 비전을, 꿈을 살아야 비로소 살아있는 삶입니다.

비전이, 꿈이 없으면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어있는 삶입니다.

얼마 전 어느 형제와 주고받은 문답이 의미심장합니다.

목적성취를 위해 열심히 살다가

뜻밖의 병으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어느 분에 대한 안타까움의 토로였습니다.

 

“위와 앞만 보고 정신없이 살았군요!”

 

위와 앞에 있는 보이는 세상의 비전인 지위와 명예, 재물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살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형제였습니다.

‘위와 앞에 있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참 비전인 하느님을 목표했다면

좀 더 여유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비전은, 꿈은 마치 태양 같습니다.

밤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태양처럼

태양 같은 하늘나라 비전이

우리 삶의 무의미와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혀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살게 합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예수님의 영원한 비전이었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온통 예수님의 관심은 하늘나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도 온통 하늘나라의 비유들이고

행복선언 역시 하늘나라가 초점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살게 하는데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늘나라 비전을 살 때 자유롭습니다.

 

세상적인 것들로 부터의 자유요 과거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그 모범입니다.

하늘나라를 사시다가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되자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참 자유로운 삶의 비결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길’ 예루살렘 가는 도중에

사마리아 인들의 냉대에 분노하는 제자들입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렇게 오래 주님과 함께 지냈어도

주님을 모르는, 하늘나라를 살지 못한

무지하고 오만한, 지엽적인 하찮은 것들에 집착하는

통 좁고 어리석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돌아서서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합니다.

예루살렘 하늘 길 도상에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다음 세 사람과의 주고받은 문답에서

하늘나라를 살 수 있는 길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물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삶을 사셨던,

세상 어디에도 정처(定處)를 두지 않은 삶을 사셨던 주님이십니다.

정처가 없다는 것, 바로 예수님의 정처는 하느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아닌 세상적인 것들에 정처를 두고 집착하여

세상의 종이 되어 사는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적인 것들에 정처를 두고 살기에

끊임없는 방황에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사실 우리 수도승은 물론이고

믿는 모든 이들의 궁극의 정처는 하느님뿐입니다.

주님 안에 정처를 두는 것이 바로 우리 분도수도승들의 정주서원이요,

이 정주 서원을 통해 참 자유로운 하늘나라

수도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정처를 두었기에

세상 안에 살되 세상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초연했던,

참으로 자유로웠던 주님이셨습니다.

무엇도 소유하지 않음으로 모두를 소유하셨던

참으로 부유하고 자유로우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참으로 하느님 안에 정처를 둔 자연스런 결과들입니다.

하느님 안에 정처를 둘 때

세상적인 것들로 부터의 자유요,

세상의 종이 아닌 세상의 주인 되어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의 자유를 살 수 있습니다.

 

이어 계속되는 문답도 흥미진진합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역시 초점은 하늘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장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실현되고 있는 하늘 나라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요,

하늘 나라를, 하느님의 마음을 분별의 잣대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적인 일들로 엉클어졌을 때

우선 하늘나라 비전을 떠 올리라는 것입니다.

태양처럼 떠오르는 하늘나라의 비전 앞에 사라지는 어둠이요

저절로 우선순위의 분별이 섭니다.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알리는 것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습니다.

진정 하늘나라의 비전이 우리 안에 살아있을수록 지혜로운 분별이요

지금 여기서 세상 한 복판에서 하늘나라의 자유를 살 수 있습니다.

 

 

다음의 문답도 우리의 성소와 직결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떠난 과거는 더 이상 생각지 말고

위와 앞에 있는 하늘나라의 비전을 앞당겨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쟁기를 잡았으면 앞으로 계속 나갈 일이지

자꾸 뒤를 바라보는 태도는 정말 하느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나간 일을 자책할 것이 아니라

지난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역동적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비전에서 샘솟는 지칠 줄 모르는 희망이요 의욕이요 활력입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금 여기의 하늘나라를 살지 못하고

과거의 상처나 나쁜 기억에 매여

불편하고 부자유하게 살아들 가는지요.

현재를 사는 게 아니라 과거를 사는 이들입니다.

과거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과거 상처의 기억들 떠오르면 단호히 떨쳐버려야 합니다.

 

하늘나라 비전을 잃어버리면

즉시 세상의 종, 과거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던

우직하고 진실해 보이는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가 자기 겉옷을 걸쳐주자 즉시 엘리야를 따라 나섭니다.

우리가 주님의 세례성사로 주님을 옷 입고

주님을 따라 나선 것과 흡사합니다.

1독서의 마지막 대목이 과거와의 철저한 결별을 상징합니다.

완전히 스승 엘리야만 보며

하느님을 따라 나선 엘리사의 단호한 행위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저는 여기서 허정무 감독의 우루과이와의 축구 결전에 앞서 예로 든

고사성어, '파부침주(破釜沈舟)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즉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으로

싸움터에 나가면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고

결전을 각오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세로 매일 오늘 지금 여기서 새롭게 하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따라 행자생활에 오른 엘리사처럼

매일 주님의 시중을 드는

겸손하고 근면한 삶 중에 실현되는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세례성사와 끊임없는 성체성사로

 자유롭게 하늘나라를 살 수 있는 모든 자격을 구비했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사도 바오로의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려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섬기십시오.”

 

자유는 그 자체가 궁극목적이 아닙니다.

육을 만족시키는 이기적 거짓 자유는

가슴 가득 허무와 환멸만 안겨줄 뿐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것만이 자유의 궁극 목적이요

서로 사랑으로 섬길 때 비로소 완성되는 자유요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늘나라공동체입니다.

진정 자유롭고 싶습니까?

사랑으로 서로 겸손히 섬기십시오.

참 자유에 이르는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성령의 인도 따라 살 때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겸손히 섬깁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거룩한 하늘나라 미사잔치에 참여한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의 자유와 사랑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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